솔직히 상당히 시리어스한 내용입니다.
담고 싶은 내용이 확실해서 진도가 잘 안나가는 거 같습니다.
그게 뭐냐고 물으시면, 부끄러우니 생략하겠다고 하렵니다.
인생이 좀 그렇죠.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건 간절하고도 애처롭게 메아리친다. 가냘프게 이어지는 목소리였다. 소녀라기보다는 변성기를 거치지 않은 소년의 목소리. 그런 이가 곁에 있지만, 그가 이렇게 무겁고 어두운 목소리로 자신을 부를 리 없다. 하지만 불특정 대다수를 향한 건 아니다. 정확하게 로쿠도 무쿠로, 자신만을 향하고 있다. 그럼 이건 누굴까? 무쿠로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마땅히 떠오르는 이가 없었기에, 다시 가능성이 그에게 넘어갔다. 지금쯤 일본은 오전 10시 무렵으로 수업시간일 테다. 환상세계라 시간감각이 무디지만, 그 정도는 쉽게 느낀다. 수업시간이라면 아무리 얼빠진 구석이 있는 그라도 당당히 잠들지 못하리라. 그에게 그럴 배짱은 없다. 거기다 그는 하늘, 모든 것을 포용한다는 대공(大空)이다. 이렇게 어둡고도 서글프지 않다. 오히려 턱없이 밝고 투명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데, 그는 무쿠로를 무서워한다. 이렇게 처절히 부를 여지가 없다. 즉, 그가 아니라는 거다.
잠시 고민하던 그가 부르는 곳으로 향한 건 한가해서다. 어차피 몸은 빈디체의 수중감옥에서 썩어가고 있고, 지금 막 일도 끝냈다. 피곤하지만, 딱히 할 일도 없으니 이 목소리의 주인공을 만나는 것도 좋으리라. 가서 재미있으면 어울려주는 거고, 아니면 돌아가서 쉬는 거고. 그는 제멋대로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싫어, 싫어, 싫어…….’
반복되는 말. 슬픔과 절망으로 점철된 목소리였다. 싫다고 하는 말밖에 들리지 않는데도 그는 저 목소리가 자신만을 향한다. 그냥 그렇게 직감했다. 이상한 일이지요, 어째서 난 그렇게 확신하는 걸까요? 조곤하게 중얼거리며 무쿠로는 타인의 세계에 들어섰다.
처절하게까지 느껴지는 목소리와 달리, 그의 세계는 눈부시도록 아름다웠다. 아득히 펼쳐진 장미정원,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한 하늘, 흐드러진 장미향은 실체처럼 향기롭다. 그리고 그 장미정원의 한가운데, 섬세한 기둥 무늬가 돋보이는 새하얀 정자(亭子)가 있었다. 묘한 기시감까지 느껴지는 풍경이다. 언제고 빛바랜 그림에서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이런 고즈넉한 곳에 온 적이 있을 리 없다. 그림에서나 봤으리라. 말 그대로 그림 같은 풍경이다. 그는 그 의외의 모습에 살짝 감탄하며 천천히 정자로 걸어갔다.
정자 안은 기이하게도 그름처럼 검은 것이 잔뜩 묻어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새까만 그림자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같은 말을 반복한다. 아, 역시 여기에 있었네요. 그는 조금 유쾌하게 중얼거리며 성큼, 그림자에 다가섰다. 조금 다가가니 어둠이 걷히며 어디에선가 많이 본 디자인의 망토가 드러났다. 일부러 깊숙이 묻어뒀던 기억이 술렁인다. 그보다 먼저 감정이 움직였다. 치밀어 오른 것은 분노, 그리고 의문이었다.
어째서 이게 여기에 있는 걸까요? 어떻게?
유희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이 세계의 주인을 없애버리고 싶다. 오래간만에 느낀 분노는 머릿속을 새하얗게 만들었다. 그건 어떤 무뢰한이 감히 성인의 옷자락을 밟은 것을 본, 맹목적인 추종자의 것과 비슷했다. 그 추종자처럼 그의 감정도 종례에는 살의가 되었다. 오래간만에 느낀 아득한 살의다. 그 덕에 그는 그 그림자가 누구인지 뒤늦게 알아차렸다.
“너 여기에서 뭐 하는 겁니까?”
그의 입에서 저절로 그런 말이 나왔다. 살의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황당함이 그 위를 뒤덮는다.
그에 싫다고만 중얼거리던 그림자가 천천히 돌아봤다. 너무 애절하게 중얼거리고 있어서 통곡이라도 한 줄 알았는데, 의외로 말끔한 얼굴이다. 얼굴을 확인하자 그는 더 어이없어졌다. 정말 예상외의 사태다. 너, 지금 수업시간 아닙니까? 그는 혀를 차며 상대의 상태를 살폈다. 그제야 맑고 투명하던 눈동자가 새까맣게 죽은 걸 알아차렸다. 평소와는 달리 아무것도 담지 않으려는 듯, 새까맣게 침전된다.
하늘이 죽었다.
“너, 괜찮습니까?”
무쿠로가 제법 조심스러운 어투로 물었다. 이런 어투가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걸 알고 있다. 그래도 이런 상태의 그에게 막말할 정도로 성격이 비틀리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심장이 내려앉을 정도로 섬뜩해서, 뭘 어떻게 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자신이 자리를 비웠던 사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가 이런 상태인 걸까? 자신에게 급한 일이 생겨서, 그걸 처리한다고 움직인 건 약 2주다. 그 사이에 그의 지인 중 하나가 죽기라도 한 걸까? 그래서 그가 이렇게 비통해하는 걸까? 하지만 그의 주위에 쉽사리 죽을 사람이 없다. 아르꼬발레노를 비롯해서 만만찮은 이들뿐이다. 그럼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무쿠로는 이러저러한 생각을 하며 그에게 다가섰다.
그는 무쿠로가 손만 뻗으면 닿을 정도로 다가서고 나서야 반응했다. 그의 얼굴이 천천히, 금방이라도 울 듯 잔뜩 이지러진다. 정말 지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위로하는 방법 따위, 모릅니다. 무쿠로는 진짜 곤란한 기분이 되었다. 그래도 조금은 달래줘야 하려나? 손만 뻗으면 닿는 거리가 부담스러워지긴 처음이다. 어쩌면 좋을까, 정말 심각하게 고민하다가 뒤늦게 깨달았다. 이건 정신의 조각이다. 즉, 이곳은 꿈이 아니라 정신 일부가 멋대로 만들어낸 세계란 거다. 진짜는 지금쯤 수업을 듣거나 딴 짓을 하거나, 확실히 깨어 있을 것이다. 이것과는 마치 별개의 존재인 냥, 그렇게 움직이고 있겠지.
“정말 애먹이는군요.”
무쿠로는 혀를 차며 그의 팔을 붙잡았다. 이 상태를 지속하면 위험하다. 자아분열의 위험성은 물론이고 자칫 잘못하면 미쳐버린다. 그러니 어떻게든 돌려보내야 한다. 다행히도 돌려보내는 방법은 쉬웠다. 자신의 상태를 자각시키면 해결되니 간단한 일이다. 그래서 그는 그와 직접적으로 접촉했다. 맞닿은 정신체로 서로의 감정이 뒤섞인다. 그가 잡은 것은 분명히 그의 팔인데, 느껴지는 건 아득한 절망이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당장에라도 실체화해서 본인에게 묻고 싶다.
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확인하듯, 무쿠로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이윽고 바스러진 미소를 짓는다. 그는 무심코 마주 보다가 그 표정에 놀라 잡고 있던 팔을 놓았다. 지독한 슬픔과 기쁨, 절망이 뒤범벅된 감정의 파도는 휘말릴 뻔했다. 환상세계를 걸으면서 수많은 경험을 한 결과, 이런 상황에 익숙했다. 그럼에도, 그런 그가 잠시 자신을 잃을 정도로 그의 감정은 강렬했다.
그가 아스라한 표정 그대로 두 팔을 벌려 무쿠로를 끌어안았다. 마치 다시는 놓지 않겠다는 듯, 애처롭게 매달린다. 무쿠로가 슬쩍 밀쳐봤지만, 그는 요지부동이다. 결국, 그는 더 뿌리치지 못하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사와다 츠나요시!”
그 목소리는 그에게 닿지 않았다.
그 상태로 근 2개월이 흘렀다.
그는 그동안 크롬에게 연락도 못 하고 그대로 붙들려 있었다. 2개월 동안 꼼짝없이 그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자신을 지켜야만 했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 정신적으로 지치는 게 어떤 것인지 절감했다. 그렇게 고생을 했는데 츠나의 상태가 이상해진 시간은 고작 1주일. 그에게 자신이 붙들려서 고생한 시간은 약 2개월이다. 시간이 맞지 않았다. 아무래도 정신이 분열된 여파가 잠재되어 있다가, 이제야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리라. 농담이 아니라 진짜 더 이상은 위험하다. 어떻게든 츠나를 원래대로 돌려보내야 한다.
그래서 그는 정신적으로 심히 지쳐 있었지만, 츠나의 부름에 응했다. 물론 불안함도 적지 않았다. 분명히 크롬의 상태가 위험해 보여서 악착같이 매달리던 그를 뿌리쳤었다. 그때의 집착과 몰아치던 감정은 그게 츠나의 일부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굉장했었다. 그걸 떠올리니 한층 어깨가 무거워진다. 과연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날뛰진 않을까? 어쩌면 완전히 거부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한층 더 집착하거나. 물론 어느 쪽이건 피곤해지긴 매한가지다.
그런 와중에 묘하게도 그의 마음 한쪽에 기대감이 생겨났다. 정말 우스운 일이다.
그는 서둘러 아름다운 장미정원을 지나, 정자로 들어섰다. 여전히 하얀 외관과 달리, 새까만 그름이 가득하다. 조금 시선을 돌리니 그곳에는 한 사람이 멍하니 서 있었다.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츠나는 어처구니없게도 그가 뿌리친 상태 그대로,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멍하니 서서 자신의 손만 바라보고 있었다.
“싫어…….”
“사와다 츠나요시!”
그가 씹어 먹을 기세로 불렀지만, 츠나는 듣지 못한 것인지 꼼짝도 하지 않는다. 전보다 한층 더 넋이 나간 상태다.
그는 할 말을 잃었다. 설마하니 내가 뿌리친 게 그렇게도 충격이었던 겁니까? 우리가 무슨 사이라고 고작 그 정도 일에! 게다가 2달이나 얌전히 있었잖습니까!? 농담이 아니라 진짜 멱살이라도 부여잡고 뒤흔들며 그렇게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아니, 츠나의 상태가 조금이라도 정상이었다면 진짜 그랬을 거다. 그는 상대가 정상이 아니라는 걸 절감하며 억지로 날뛰려는 몸을 억눌렀다. 덕분에 어이없음과 황당함이 뒤섞여, 종국에는 이해불능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조금만 더 참자. 이렇게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기는 또 처음이다. 아, 진짜 여러모로 애먹이네요.
“사와다 츠나요시, 그만 정신 차리세요! 봉골레의 10대째라는 사람이 이래도 됩니까?”
그가 츠나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그제야 그가 돌아왔다는 걸 알아차린 건지, 츠나가 멍한 눈동자로 그를 올려다봤다. 아무런 표정도 없던 얼굴이 천천히 일그러지며 그를 끌어안는다. 두 번 다시는 놓지 않겠다는 듯이, 손이 새하얗게 도드라질 정도로 강하게 끌어안고 놓으려 하지 않는다. 당황한 그가 떨어뜨리려고 손에 힘을 주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강하게 끌어안으며 비명처럼 싫다고 속삭인다.
이건 틀림없는 집착이다. 하지만 츠나는 분명히 그를 무서워하고 있지 않았던가? 그런데 어째서?
“너, 나한테 뭘 원하는 겁니까?”
그게 그가 원했던 말이었을까? 그는 하염없이 계속되던 중얼거림을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무쿠로의 얼굴을 확인했다. 도통 놓지 않던 손을 풀어 그 뺨을 감싼다. 마치 이곳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듯 조심스럽게 그 얼굴을 어루만졌다. 잠깐이지만, 새까맣게 죽어 있던 눈동자에 조금 빛이 돌아왔다. 그는 뭔가를 말하고 싶은 듯, 입술을 달싹였다.
그 상태까지 가서야 무쿠로는 그가 사와다 츠나요시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분명히 그의 정신에서 분리된 존재지만, 다른 존재다. 그러니 착각할 수밖에. 맙소사! 소리 없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뭘 원하느냐고?”
그가 조심스러운 손길로 무쿠로의 입술을 쓰다듬었다. 상냥하고도 조심스럽게, 마치 잃어버린 연인을 대하듯 애달픈 손길이었다. 그는 뜻밖의 상황에 잔뜩 굳어버린 무쿠로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살며시 끌어당겨 그 귓가에 속삭였다.
“거짓말쟁이. 잔혹한 거짓말쟁이. 끝까지 거짓말을 했어. 내가. 네가.”
억지로 잊었던 진실이 치명타가 되었다. 무쿠로의 몸이 움찔거리자, 그는 만족스레 웃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 그려진 참혹하게 부서진 잔상이 있다. 차라리 우는 게 나을 정도로 비통하다. 꽃처럼 화사하게 웃고 있는데, 그 끝은 비틀린 폐허다. 이렇게나 아름다운데, 사실은 망가져 있는 거다. 위로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너무나도 선명히 드러난 처절함이 무쿠로의 머릿속을 헝클린다. 그만 하라고, 차라리 원망하라는 말이 목에 걸려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하, 이러니 지옥에 떨어진 거군요. 비틀린 웃음이 무쿠로의 입가에 그려졌다.
그는 살짝 무쿠로를 밀었다. 딱히 힘을 준 건 아니지만, 무쿠로는 저항할 생각도 못했기에 그냥 주저앉았다. 그는 그런 그의 목을 끌어안고 힘을 뺐다. 자연히 가중되는 무게에 무쿠로의 몸이 기울어진다. 그에 그는 한층 체중을 실었다. 서로 마주한 얼굴이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평상시의 무쿠로라면 분명히 대수롭지 않게 넘겼겠지만, 지금은 심리적으로 부담스러웠다. 이대로는 위험하다. 그래서 그는 슬쩍 고개를 돌려 피했다. 하지만 그는 그런 걸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외면하려는 그의 얼굴을 잡고 억지로 시선을 마주했다. 무쿠로의 시야 가득, 본연의 색을 잃은 다갈색 눈동자만이 담긴다. 정말, 그의 이런 눈빛과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무쿠로의 바람과는 달리 둘의 거리는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입술이 스칠 정도로 가까워지고서야 멈췄다. 그가 그 상태로 입술을 달싹인다.
“배신자.”
그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끝까지 울지 않았다.
휘말렸다. 타인의 세계라 그런지 맞닿은 감정에서 ‘자신’을 유지하기 어렵다. 무쿠로는 점점 거칠어지는 감정을 억지로 다스렸다. 이대로 휘둘리기만 하면 그와 함께 끝장이다. 같이 망가져 버릴 거다. 그건 안 돼. 자신도, 그도 돌아가야 하는 장소가 있다. 여기에서 사이좋게 부서질 순 없다. 무엇보다 이 이상 휘둘리는 건 사양이다. 왜 잊었었는데!
무쿠로는 자신의 페이스를 회복하기 위해 되는대로 내뱉었다.
“그럼 배신자를 보는 눈으로 보세요. 그게 네 거짓말입니까?”
그가 조금 웃었다. 맞지만, 틀리다. 이거군요. 무쿠로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웃는 눈동자가 쓸쓸하게 보여서 안타까웠다. 무심코,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감쌌다. 감상에 젖어서는 안 되는데, 도저히 내버려 둘 수 없다. 어째서 깨어난 겁니까? 난 잊었었는데……. 다시 아스라한 기분에 젖어든다. 웃기지도 않지.
“보통 ‘자아’를 자각하면 돌아가기 마련입니다만, 넌 왜 이대로 있습니까?”
무쿠로는 억지로 현실로 돌아왔다. 그는 대답하지 않으리라. 아득한 기억 저편의 그는 청명한 하늘이었다. 지금도 하늘이건만, 어딘가 망가졌다. 누구 때문에? 알면서 모르는 척 질문을 던져본다. 뻔히 보이는 답이 싫어서 잊어버린 척하며, 외면한다. 이제 더는 얽히고 싶지 않았다. 그 때문에 그가 다시 상처 입더라도, 자신과는 상관없다. 그래야 했다. 아니면 잊은 의미가 없다.
맞닿은 감정이 무쿠로의 생각을 전한다. 그의 표정이 비틀렸다.
“떠날 거야?”
“곤란하네요,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떠날 거야?”
“너도 여기에서 떠나야 합니다. 지금이 위험한 상황이라는 거 알지 않습니까?”
“떠날 거야?”
물끄러미 바라보는 침전된 눈동자가 심장을 두드린다. 장미향기가 머릿속을 헝클어트렸다. 떠나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런 건 이제 상관없어. 간신히 잡아놓은 페이스가 부서지는 느낌이다. 벗어날 수 없어진다. 키스라도 해버릴까? 그러면 현재의 츠나가 튀어나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랬다간 끝장이다. 무쿠로는 문득 자신의 지금 표정을 알고 싶어졌다. 분명히 엉망진창이겠지.
“떠날 거야?”
그의 목소리는 무감각했건만, 무쿠로에게는 흐느끼므로 들렸다. 망설이므로 머뭇거리던 그의 입술이 달싹여지며 기어코 그가 원하는 대답을 자아냈다.
“네 곁은 떠나지 않을 겁니다. 네가 원하는 한.”
그는 한동안 반응하지 않았다. 이윽고 그가 산산이 부서진 미소를 그리며 천천히 일어섰다. 자신에게서 떨어지는 그의 손이 가늘게 떨리는 걸 보며 무쿠로는 쓰게 웃었다. 역시 상처 입혔다. 그가 조각난 눈동자로 속삭인다.
“거짓말쟁이.”
그 순간, 그가 자신의 세계에서 그를 추방했다.
글 중간에 묘사가 정말 마음에 안드는 데 수정해도 제자리 걸음이라 방치하다가 간신히 고쳤습니다.
그래도 마음에 안드는 건 같네요.
영상을 떠올리며 묘사하기 때문에 그이면서 그림같은 느낌을 주네요.
그냥 글로된 만화책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그런 주제에 길이가 길지만, 살포시 무시해주세면 됩니다.
수정할 때면 끝이 보이지 않아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담고 싶은 내용이 확실해서 진도가 잘 안나가는 거 같습니다.
그게 뭐냐고 물으시면, 부끄러우니 생략하겠다고 하렵니다.
인생이 좀 그렇죠.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건 간절하고도 애처롭게 메아리친다. 가냘프게 이어지는 목소리였다. 소녀라기보다는 변성기를 거치지 않은 소년의 목소리. 그런 이가 곁에 있지만, 그가 이렇게 무겁고 어두운 목소리로 자신을 부를 리 없다. 하지만 불특정 대다수를 향한 건 아니다. 정확하게 로쿠도 무쿠로, 자신만을 향하고 있다. 그럼 이건 누굴까? 무쿠로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마땅히 떠오르는 이가 없었기에, 다시 가능성이 그에게 넘어갔다. 지금쯤 일본은 오전 10시 무렵으로 수업시간일 테다. 환상세계라 시간감각이 무디지만, 그 정도는 쉽게 느낀다. 수업시간이라면 아무리 얼빠진 구석이 있는 그라도 당당히 잠들지 못하리라. 그에게 그럴 배짱은 없다. 거기다 그는 하늘, 모든 것을 포용한다는 대공(大空)이다. 이렇게 어둡고도 서글프지 않다. 오히려 턱없이 밝고 투명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데, 그는 무쿠로를 무서워한다. 이렇게 처절히 부를 여지가 없다. 즉, 그가 아니라는 거다.
잠시 고민하던 그가 부르는 곳으로 향한 건 한가해서다. 어차피 몸은 빈디체의 수중감옥에서 썩어가고 있고, 지금 막 일도 끝냈다. 피곤하지만, 딱히 할 일도 없으니 이 목소리의 주인공을 만나는 것도 좋으리라. 가서 재미있으면 어울려주는 거고, 아니면 돌아가서 쉬는 거고. 그는 제멋대로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싫어, 싫어, 싫어…….’
반복되는 말. 슬픔과 절망으로 점철된 목소리였다. 싫다고 하는 말밖에 들리지 않는데도 그는 저 목소리가 자신만을 향한다. 그냥 그렇게 직감했다. 이상한 일이지요, 어째서 난 그렇게 확신하는 걸까요? 조곤하게 중얼거리며 무쿠로는 타인의 세계에 들어섰다.
처절하게까지 느껴지는 목소리와 달리, 그의 세계는 눈부시도록 아름다웠다. 아득히 펼쳐진 장미정원,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한 하늘, 흐드러진 장미향은 실체처럼 향기롭다. 그리고 그 장미정원의 한가운데, 섬세한 기둥 무늬가 돋보이는 새하얀 정자(亭子)가 있었다. 묘한 기시감까지 느껴지는 풍경이다. 언제고 빛바랜 그림에서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이런 고즈넉한 곳에 온 적이 있을 리 없다. 그림에서나 봤으리라. 말 그대로 그림 같은 풍경이다. 그는 그 의외의 모습에 살짝 감탄하며 천천히 정자로 걸어갔다.
정자 안은 기이하게도 그름처럼 검은 것이 잔뜩 묻어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새까만 그림자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같은 말을 반복한다. 아, 역시 여기에 있었네요. 그는 조금 유쾌하게 중얼거리며 성큼, 그림자에 다가섰다. 조금 다가가니 어둠이 걷히며 어디에선가 많이 본 디자인의 망토가 드러났다. 일부러 깊숙이 묻어뒀던 기억이 술렁인다. 그보다 먼저 감정이 움직였다. 치밀어 오른 것은 분노, 그리고 의문이었다.
어째서 이게 여기에 있는 걸까요? 어떻게?
유희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이 세계의 주인을 없애버리고 싶다. 오래간만에 느낀 분노는 머릿속을 새하얗게 만들었다. 그건 어떤 무뢰한이 감히 성인의 옷자락을 밟은 것을 본, 맹목적인 추종자의 것과 비슷했다. 그 추종자처럼 그의 감정도 종례에는 살의가 되었다. 오래간만에 느낀 아득한 살의다. 그 덕에 그는 그 그림자가 누구인지 뒤늦게 알아차렸다.
“너 여기에서 뭐 하는 겁니까?”
그의 입에서 저절로 그런 말이 나왔다. 살의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황당함이 그 위를 뒤덮는다.
그에 싫다고만 중얼거리던 그림자가 천천히 돌아봤다. 너무 애절하게 중얼거리고 있어서 통곡이라도 한 줄 알았는데, 의외로 말끔한 얼굴이다. 얼굴을 확인하자 그는 더 어이없어졌다. 정말 예상외의 사태다. 너, 지금 수업시간 아닙니까? 그는 혀를 차며 상대의 상태를 살폈다. 그제야 맑고 투명하던 눈동자가 새까맣게 죽은 걸 알아차렸다. 평소와는 달리 아무것도 담지 않으려는 듯, 새까맣게 침전된다.
하늘이 죽었다.
“너, 괜찮습니까?”
무쿠로가 제법 조심스러운 어투로 물었다. 이런 어투가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걸 알고 있다. 그래도 이런 상태의 그에게 막말할 정도로 성격이 비틀리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심장이 내려앉을 정도로 섬뜩해서, 뭘 어떻게 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자신이 자리를 비웠던 사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가 이런 상태인 걸까? 자신에게 급한 일이 생겨서, 그걸 처리한다고 움직인 건 약 2주다. 그 사이에 그의 지인 중 하나가 죽기라도 한 걸까? 그래서 그가 이렇게 비통해하는 걸까? 하지만 그의 주위에 쉽사리 죽을 사람이 없다. 아르꼬발레노를 비롯해서 만만찮은 이들뿐이다. 그럼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무쿠로는 이러저러한 생각을 하며 그에게 다가섰다.
그는 무쿠로가 손만 뻗으면 닿을 정도로 다가서고 나서야 반응했다. 그의 얼굴이 천천히, 금방이라도 울 듯 잔뜩 이지러진다. 정말 지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위로하는 방법 따위, 모릅니다. 무쿠로는 진짜 곤란한 기분이 되었다. 그래도 조금은 달래줘야 하려나? 손만 뻗으면 닿는 거리가 부담스러워지긴 처음이다. 어쩌면 좋을까, 정말 심각하게 고민하다가 뒤늦게 깨달았다. 이건 정신의 조각이다. 즉, 이곳은 꿈이 아니라 정신 일부가 멋대로 만들어낸 세계란 거다. 진짜는 지금쯤 수업을 듣거나 딴 짓을 하거나, 확실히 깨어 있을 것이다. 이것과는 마치 별개의 존재인 냥, 그렇게 움직이고 있겠지.
“정말 애먹이는군요.”
무쿠로는 혀를 차며 그의 팔을 붙잡았다. 이 상태를 지속하면 위험하다. 자아분열의 위험성은 물론이고 자칫 잘못하면 미쳐버린다. 그러니 어떻게든 돌려보내야 한다. 다행히도 돌려보내는 방법은 쉬웠다. 자신의 상태를 자각시키면 해결되니 간단한 일이다. 그래서 그는 그와 직접적으로 접촉했다. 맞닿은 정신체로 서로의 감정이 뒤섞인다. 그가 잡은 것은 분명히 그의 팔인데, 느껴지는 건 아득한 절망이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당장에라도 실체화해서 본인에게 묻고 싶다.
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확인하듯, 무쿠로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이윽고 바스러진 미소를 짓는다. 그는 무심코 마주 보다가 그 표정에 놀라 잡고 있던 팔을 놓았다. 지독한 슬픔과 기쁨, 절망이 뒤범벅된 감정의 파도는 휘말릴 뻔했다. 환상세계를 걸으면서 수많은 경험을 한 결과, 이런 상황에 익숙했다. 그럼에도, 그런 그가 잠시 자신을 잃을 정도로 그의 감정은 강렬했다.
그가 아스라한 표정 그대로 두 팔을 벌려 무쿠로를 끌어안았다. 마치 다시는 놓지 않겠다는 듯, 애처롭게 매달린다. 무쿠로가 슬쩍 밀쳐봤지만, 그는 요지부동이다. 결국, 그는 더 뿌리치지 못하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사와다 츠나요시!”
그 목소리는 그에게 닿지 않았다.
그 상태로 근 2개월이 흘렀다.
그는 그동안 크롬에게 연락도 못 하고 그대로 붙들려 있었다. 2개월 동안 꼼짝없이 그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자신을 지켜야만 했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 정신적으로 지치는 게 어떤 것인지 절감했다. 그렇게 고생을 했는데 츠나의 상태가 이상해진 시간은 고작 1주일. 그에게 자신이 붙들려서 고생한 시간은 약 2개월이다. 시간이 맞지 않았다. 아무래도 정신이 분열된 여파가 잠재되어 있다가, 이제야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리라. 농담이 아니라 진짜 더 이상은 위험하다. 어떻게든 츠나를 원래대로 돌려보내야 한다.
그래서 그는 정신적으로 심히 지쳐 있었지만, 츠나의 부름에 응했다. 물론 불안함도 적지 않았다. 분명히 크롬의 상태가 위험해 보여서 악착같이 매달리던 그를 뿌리쳤었다. 그때의 집착과 몰아치던 감정은 그게 츠나의 일부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굉장했었다. 그걸 떠올리니 한층 어깨가 무거워진다. 과연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날뛰진 않을까? 어쩌면 완전히 거부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한층 더 집착하거나. 물론 어느 쪽이건 피곤해지긴 매한가지다.
그런 와중에 묘하게도 그의 마음 한쪽에 기대감이 생겨났다. 정말 우스운 일이다.
그는 서둘러 아름다운 장미정원을 지나, 정자로 들어섰다. 여전히 하얀 외관과 달리, 새까만 그름이 가득하다. 조금 시선을 돌리니 그곳에는 한 사람이 멍하니 서 있었다.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츠나는 어처구니없게도 그가 뿌리친 상태 그대로,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멍하니 서서 자신의 손만 바라보고 있었다.
“싫어…….”
“사와다 츠나요시!”
그가 씹어 먹을 기세로 불렀지만, 츠나는 듣지 못한 것인지 꼼짝도 하지 않는다. 전보다 한층 더 넋이 나간 상태다.
그는 할 말을 잃었다. 설마하니 내가 뿌리친 게 그렇게도 충격이었던 겁니까? 우리가 무슨 사이라고 고작 그 정도 일에! 게다가 2달이나 얌전히 있었잖습니까!? 농담이 아니라 진짜 멱살이라도 부여잡고 뒤흔들며 그렇게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아니, 츠나의 상태가 조금이라도 정상이었다면 진짜 그랬을 거다. 그는 상대가 정상이 아니라는 걸 절감하며 억지로 날뛰려는 몸을 억눌렀다. 덕분에 어이없음과 황당함이 뒤섞여, 종국에는 이해불능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조금만 더 참자. 이렇게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기는 또 처음이다. 아, 진짜 여러모로 애먹이네요.
“사와다 츠나요시, 그만 정신 차리세요! 봉골레의 10대째라는 사람이 이래도 됩니까?”
그가 츠나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그제야 그가 돌아왔다는 걸 알아차린 건지, 츠나가 멍한 눈동자로 그를 올려다봤다. 아무런 표정도 없던 얼굴이 천천히 일그러지며 그를 끌어안는다. 두 번 다시는 놓지 않겠다는 듯이, 손이 새하얗게 도드라질 정도로 강하게 끌어안고 놓으려 하지 않는다. 당황한 그가 떨어뜨리려고 손에 힘을 주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강하게 끌어안으며 비명처럼 싫다고 속삭인다.
이건 틀림없는 집착이다. 하지만 츠나는 분명히 그를 무서워하고 있지 않았던가? 그런데 어째서?
“너, 나한테 뭘 원하는 겁니까?”
그게 그가 원했던 말이었을까? 그는 하염없이 계속되던 중얼거림을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무쿠로의 얼굴을 확인했다. 도통 놓지 않던 손을 풀어 그 뺨을 감싼다. 마치 이곳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듯 조심스럽게 그 얼굴을 어루만졌다. 잠깐이지만, 새까맣게 죽어 있던 눈동자에 조금 빛이 돌아왔다. 그는 뭔가를 말하고 싶은 듯, 입술을 달싹였다.
그 상태까지 가서야 무쿠로는 그가 사와다 츠나요시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분명히 그의 정신에서 분리된 존재지만, 다른 존재다. 그러니 착각할 수밖에. 맙소사! 소리 없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뭘 원하느냐고?”
그가 조심스러운 손길로 무쿠로의 입술을 쓰다듬었다. 상냥하고도 조심스럽게, 마치 잃어버린 연인을 대하듯 애달픈 손길이었다. 그는 뜻밖의 상황에 잔뜩 굳어버린 무쿠로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살며시 끌어당겨 그 귓가에 속삭였다.
“거짓말쟁이. 잔혹한 거짓말쟁이. 끝까지 거짓말을 했어. 내가. 네가.”
억지로 잊었던 진실이 치명타가 되었다. 무쿠로의 몸이 움찔거리자, 그는 만족스레 웃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 그려진 참혹하게 부서진 잔상이 있다. 차라리 우는 게 나을 정도로 비통하다. 꽃처럼 화사하게 웃고 있는데, 그 끝은 비틀린 폐허다. 이렇게나 아름다운데, 사실은 망가져 있는 거다. 위로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너무나도 선명히 드러난 처절함이 무쿠로의 머릿속을 헝클린다. 그만 하라고, 차라리 원망하라는 말이 목에 걸려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하, 이러니 지옥에 떨어진 거군요. 비틀린 웃음이 무쿠로의 입가에 그려졌다.
그는 살짝 무쿠로를 밀었다. 딱히 힘을 준 건 아니지만, 무쿠로는 저항할 생각도 못했기에 그냥 주저앉았다. 그는 그런 그의 목을 끌어안고 힘을 뺐다. 자연히 가중되는 무게에 무쿠로의 몸이 기울어진다. 그에 그는 한층 체중을 실었다. 서로 마주한 얼굴이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평상시의 무쿠로라면 분명히 대수롭지 않게 넘겼겠지만, 지금은 심리적으로 부담스러웠다. 이대로는 위험하다. 그래서 그는 슬쩍 고개를 돌려 피했다. 하지만 그는 그런 걸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외면하려는 그의 얼굴을 잡고 억지로 시선을 마주했다. 무쿠로의 시야 가득, 본연의 색을 잃은 다갈색 눈동자만이 담긴다. 정말, 그의 이런 눈빛과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무쿠로의 바람과는 달리 둘의 거리는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입술이 스칠 정도로 가까워지고서야 멈췄다. 그가 그 상태로 입술을 달싹인다.
“배신자.”
그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끝까지 울지 않았다.
휘말렸다. 타인의 세계라 그런지 맞닿은 감정에서 ‘자신’을 유지하기 어렵다. 무쿠로는 점점 거칠어지는 감정을 억지로 다스렸다. 이대로 휘둘리기만 하면 그와 함께 끝장이다. 같이 망가져 버릴 거다. 그건 안 돼. 자신도, 그도 돌아가야 하는 장소가 있다. 여기에서 사이좋게 부서질 순 없다. 무엇보다 이 이상 휘둘리는 건 사양이다. 왜 잊었었는데!
무쿠로는 자신의 페이스를 회복하기 위해 되는대로 내뱉었다.
“그럼 배신자를 보는 눈으로 보세요. 그게 네 거짓말입니까?”
그가 조금 웃었다. 맞지만, 틀리다. 이거군요. 무쿠로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웃는 눈동자가 쓸쓸하게 보여서 안타까웠다. 무심코,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감쌌다. 감상에 젖어서는 안 되는데, 도저히 내버려 둘 수 없다. 어째서 깨어난 겁니까? 난 잊었었는데……. 다시 아스라한 기분에 젖어든다. 웃기지도 않지.
“보통 ‘자아’를 자각하면 돌아가기 마련입니다만, 넌 왜 이대로 있습니까?”
무쿠로는 억지로 현실로 돌아왔다. 그는 대답하지 않으리라. 아득한 기억 저편의 그는 청명한 하늘이었다. 지금도 하늘이건만, 어딘가 망가졌다. 누구 때문에? 알면서 모르는 척 질문을 던져본다. 뻔히 보이는 답이 싫어서 잊어버린 척하며, 외면한다. 이제 더는 얽히고 싶지 않았다. 그 때문에 그가 다시 상처 입더라도, 자신과는 상관없다. 그래야 했다. 아니면 잊은 의미가 없다.
맞닿은 감정이 무쿠로의 생각을 전한다. 그의 표정이 비틀렸다.
“떠날 거야?”
“곤란하네요,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떠날 거야?”
“너도 여기에서 떠나야 합니다. 지금이 위험한 상황이라는 거 알지 않습니까?”
“떠날 거야?”
물끄러미 바라보는 침전된 눈동자가 심장을 두드린다. 장미향기가 머릿속을 헝클어트렸다. 떠나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런 건 이제 상관없어. 간신히 잡아놓은 페이스가 부서지는 느낌이다. 벗어날 수 없어진다. 키스라도 해버릴까? 그러면 현재의 츠나가 튀어나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랬다간 끝장이다. 무쿠로는 문득 자신의 지금 표정을 알고 싶어졌다. 분명히 엉망진창이겠지.
“떠날 거야?”
그의 목소리는 무감각했건만, 무쿠로에게는 흐느끼므로 들렸다. 망설이므로 머뭇거리던 그의 입술이 달싹여지며 기어코 그가 원하는 대답을 자아냈다.
“네 곁은 떠나지 않을 겁니다. 네가 원하는 한.”
그는 한동안 반응하지 않았다. 이윽고 그가 산산이 부서진 미소를 그리며 천천히 일어섰다. 자신에게서 떨어지는 그의 손이 가늘게 떨리는 걸 보며 무쿠로는 쓰게 웃었다. 역시 상처 입혔다. 그가 조각난 눈동자로 속삭인다.
“거짓말쟁이.”
그 순간, 그가 자신의 세계에서 그를 추방했다.
그래도 마음에 안드는 건 같네요.
영상을 떠올리며 묘사하기 때문에 그이면서 그림같은 느낌을 주네요.
그냥 글로된 만화책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그런 주제에 길이가 길지만, 살포시 무시해주세면 됩니다.
수정할 때면 끝이 보이지 않아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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