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까지만 해도 그럭저럭 속도가 났었던 것 같은데 말입니다?
인생은 예측불허라더니… 지금은 무한대로 지지부진 상태입니다.
쓰고 싶던 부분을 쓰는데 왜 지지부진 일까요?
때때로 진심과 소망은 다르다. 마음이 원하는 대로 바랄 수 없기에 인생은 재미있다. 한때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네 진심과 소망이 다르다는 걸 알면서도 이뤄주겠다고 했다. 네가 결국 소망을 택하리라는 걸 알면서 그렇게 말했다. 수단을 가리지 않고 결과만을 위해 움직였다. 그게 널 부수리라는 것쯤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나라는 존재가 결국 널 죽이는 맹독이 된다고 확신했다. 그 시점에서 널 떠났어야 했다.
난 그러지 못했고, 넌 결국 죽었다.
‘내 손으로 널 죽였다.’
일그러진 상념이 머릿속을 잠식한다. 감정을 흔들어 애써 억누르고 있던 과거를 갈구한다. 무엇을 위해서? 과거는 과거일 뿐, 후회와 탄식으로 뒤범벅된 그게 뭐가 그리 좋다고 계속 찾으려 하는 걸까? 그런 건 필요 없다. 가치 없는 일이다. 모두 잊어버리면 끝나는 몽상에 불과하다.
로쿠도 무쿠로는 그렇게 자신을 뒤흔드는 모든 생각을 무의식의 저편에 구겨 넣었다. 그리고 차근히 자신의 상태를 관조했다. 타인의 세계에서 강제로 내쫓겼다. 어쩌면 힘의 반, 그 이상을 잃었을 수 있다. 아니, 죽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어쩌면 그때의 여파로 몇 년이나 기절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건 가정할 수 있는 상황 중 정말 최악의 상황이다. 그런 여러 경우의 수를 따지며 자신을 관조한 끝에, 그는 자신의 상태가 굉장히 멀쩡하다는 걸 깨달았다. 힘의 손실도 거의 없을뿐더러, 잘 모르긴 해도 며칠 흐르지 않은 것 같다. 기껏해야 1주일? 어쩌면 하루다.
‘넌 그런 상태가 되어서도 상냥하군요.’
그럼 정확하게 얼마나 지났을까? 빛도 닿지 않는 빈디체의 감옥에서 알 수 없으니, 일단 크롬에게 가자. 그래서 사와다 츠나요시의 상태를 살피자. 그는 그렇게 결정했다.
무쿠로가 그렇게 결정할 때쯤, 크롬은 사흘째 츠나의 집에서 푹 쉬고 있었다.
그건 다 리본이 약속은 약속이라며 여러모로 편의를 봐준 덕이다. 물론 리본은 말만 하고 전부 츠나요시의 어머니인 나나가 해줬다. 식사는 물론이고 잠자리, 의복까지 꼼꼼히 챙겨주셔서, 고쿠요 랜드의 생활과 비교도 할 수 없으리만치 훌륭해졌다. 그녀의 자상한 관심 덕에 크롬도 어느 틈엔가 그녀를 마망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만큼 크롬의 몸은 편해졌지만, 마음은 불편했다. 츠나의 집에 신세를 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무쿠로의 말에 따른 것이니 그에 따른 불만 같은 건 조금도 없었다. 오히려 그만큼 자신에게 관심을 둔다는 사실이 기뻤었다. 하지만 불안한 마음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그건 간신히 닿았던 그와의 연락이 다시 끊겼기 때문이다. 어째서? 무쿠로님, 왜 대답해주지 않으세요? 인내심이 부족한 켄은 그녀를 닦달하다가 신경질을 내며 과자나 사러 나갔다. 치쿠사도 그를 밤새 기다리다 이제야 간신히 선잠이 들었다.
‘무쿠로님…….’
다시 불러보지만 닿지 않는다. 그녀는 잔뜩 풀이 죽어 그와 이어진 증거인 창을 꼭 끌어안았다.
리본이 그녀에게 말을 건 건 그쯤이었다.
“무쿠로와의 연락은 아직 인가 보군.”
기척도 없이 나타난 그의 질문에 그녀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신경 쓰던 사실을 지적당한 탓인지, 그녀의 표정이 한층 어두워진다. 역시 무슨 일이 있었던 거로군. 리본은 그렇게 확신하며 그녀에게 다가섰다.
켄과 치쿠사는 마피아에 대한 경계가 심해서 협조라고는 조금도 하지 않는다. 그건 소젝토(Soggetto : 실험체)가 되었던 시절의 역작용이리라. 무쿠로는 그보다 심해서 필요한 정보도 흘리지 않는다. 녀석만 믿다가는 엿 먹을 가능성이 컸다. 아니, 적어도 조금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 이쪽에서도 대처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일부러 크롬이 혼자가 된 지금 온 것이다. 크롬은 그렇게까지 경계가 심하지 않으니까.
리본은 흘리듯, 가장 궁금한 걸 물었다.
“무쿠로와의 연락이 끊겼었던 거냐?”
“응…….”
“언제부터?”
“2개월 전쯤부터…….”
"이유는?"
"몰라."
그녀는 시무룩한 얼굴로 창을 어루만졌다.
2개월 전, [급한 일이 생겨서 연락을 못 할 수 있습니다. 연락이 끊기더라도 당황하지 말고 기다리세요.]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그와의 연락이 끊겼었다. 그녀가 아는 건 그게 전부다. 연락이 끊길 수 있다는 게 무서웠지만, 그래도 곧 일을 처리하고 돌아오리라. 무쿠로님은 강하시니까. 그녀는 그렇게 믿고 기다렸다. 그렇게 연락이 끊기고 1달이 흐르자 점점 무서워졌었다. 혹시 그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아니, 그럴 리 없다. 그냥 일이 지연되고 있는 거겠지. 그렇게 믿었지만, 불안함이 가시지 않았다.
연락이 끊기더라도 당황하지 말고 기다리세요.
반복해서 머릿속에 울리는 그의 목소리. 사라지지 않는 창과 자신의 생존이 그의 무사함을 알려줬기에 그저 믿으며 기다렸었다. 시간은 야속하게 흘러갔다. 기어코 기다림에 지친 그녀가 매일 그를 불렀다. 부디 자신의 목소리가 그에게 닿길 바라며 애타게 찾았다. 그러나 아무리 그를 불러도, 누군가가 중간에서 방해하는 것처럼 끝내 닿지 않았다. 결국, 그녀의 위험을 느낀 그가 올 때까지의 2개월간 막연한 기다림이 주는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그녀의 목소리가 그에게 닿지 않는다.
'무쿠로님…….'
[나의 귀여운 크롬, 이제 몸은 좀 괜찮습니까?]
그토록 기다리던 목소리다. 다정다감한 그의 목소리에 그녀의 안색이 밝아졌다. 물어보고 싶은 말이 정말 많았지만, 목이 메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냥 그가 와 주었다는 사실이 기뻐서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는 어린아이처럼 몇 번이고 반복해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진짜 그가 바로 곁에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무쿠로님! 그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그녀의 부름에 응했다.
[많이 무서웠나 보군요. 이제 괜찮습니다, 나의 크롬.]
‘네, 네!’
그녀는 그제야 간신히 웃을 수 있었다.
크롬은 원래 표정변화가 드물었다. 그렇다 보니 조금 웃는 것만으로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쉬이 짐작할 수 있다. 특히나 조금 전까지 어둡던 표정이 밝아졌으니, 그게 의미하는 건 하나다. 순식간에 상황을 판단한 리본은 조금 의외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1, 2주는 지나야 얼굴을 비추리라 생각했는데, 고작 사흘 만에 나타나다니 말이다. 그래도 일찍 나타나서 다행이다. 리본이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지금 츠나의 상태는 나빴다.
아무리 급해도 상대의 사정을 헤아리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그렇기에 리본은 둘의 해후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 조금 여유시간을 가졌다.
“무쿠로가 온 거냐?”
“으, 응.”
크롬이 살짝 울먹이며 고개를 끄덕인다.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그만큼 그녀의 마음고생이 심했다는 것이리라. 그게 안쓰러웠지만, 더는 시간을 할애해 줄 수 없었다. 그 리본이 조금 조급해질 정도로, 고작 그 며칠 사이에 츠나의 상태는 심각해졌다.
처음에는 그냥 멍하니 넋을 빼놓고 있었는데, 지금은 갑작스럽게 기절하듯 잠드는 경우도 생겼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건 애교다. 난데없이 자해하기도 하고, 가스레인지의 불을 보고 발작해서 물을 끼얹으려 한 적도 있었다. 어제만 해도 종일 넋 놓은 상태로 거리를 싸돌아다녔다. 그런 일이 반복될수록 츠나가 버틸 수 있는 한계가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점점 끝이 다가오는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었다. 문제는 그런 예감일수록 잘 맞아떨어진다는 거지. 리본은 입술을 질근 깨물었다. 이대로 제자를 잃을 수 없다.
“무쿠로, 이제 계약을 이행해라.”
이제는 그를 재촉하는 수밖에 없다.
리본이 자세한 사정을 말한 건 아니지만,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짐작한 그가 크롬과 자리를 바꿨다. 물론, 실체화는 하지 않았다. 고작 대화만 하는데 그렇게 힘을 소비할 여유는 없다. 이미 딱딱하게 굳은 리본의 표정만큼, 그의 표정도 싸하게 굳어 있었다.
“사흘이 지난 게 맞습니까?”
“크롬을 부탁한 시간이라면 맞다. 그건 왜 묻지?”
“필요해서, 입니다. 그럼 2개월쯤 전에 봉골레가 접한 소식을 말해주시겠습니까?”
“꽤 구체적인 날짜군. 벌써 접촉했던 거냐?”
“마피아와의 거래 따위를, 오래 할 생각 없습니다.”
무쿠로이기에 이해가 가는 이유다. 어차피 리본과 그의 사이는 불신의 골이 깊다. 더 확실하게 말하자면, 리본이 믿는 건 그의 실력밖에 없다. 최강의 아기라 불리는 아르꼬발레노 바이퍼를 압도적으로 물리쳤으니 그것만은 믿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다가 하필이면 요구하는 것이 2개월 전이다. 2개월 전이라면 그가 크롬과 연락이 끊겼던 시점이지 않나? 역시 무슨 관련이 있는 걸까? 한번 의구심이 들자 점점 미덥지 않아졌다. 그간의 행적이 그의 그런 마음을 가중시킨다. 리본은 진짜 그런 게 필요 하느냐는 의미가 가득한 시선으로 그를 노려봤다.
그가 슬쩍 고개를 끄덕인다. 딱히 속이는 기색도 없고, 조금 생각해보니 특별할 것도 없는 자료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서야, 리본은 천천히 기억을 더듬었다.
“그쯤이라면 특별한 일이 없었다. 하나 있다면, 네 녀석이 반디에르 패밀리를 괴멸시켰다는 게 다다.”
“…… 그것뿐입니까?”
“그래.”
그때의 일을 떠올리며 리본은 날카롭게 그를 노려봤다. 빈디체의 감옥에 아직 갇혀 있으면서 멋대로 날뛰다니! 그가 츠나의 수호자라는 건 비밀이 아닌지라, 곧 사방에서 항의가 쏟아졌었다. 반디에르 패밀리가 괴멸되어야 했던 이유를 설명해 달라는 건 기본이고, 빈디체의 감옥에 갇힌 자가 이렇게 날뛰어도 되느냐, 빈디체가 제 역할을 못하는 거 아니냐는 항의도 있었다. 반디에르 패밀리에서 혹시 봉골레 패밀리에게 반기를 들었던 적이 있느냐면서, 배신자 제거의 일환이냐…… 하나하나 언급하자면 끝도 없었다. 9대가 이리저리 움직여 간신히 흐지부지 시켰지만, 그 당시의 일은 그냥 악몽이다. 오죽하면 9대가 리본에게 앞으로는 수호자의 일에도 신경을 써달라는 편지를 보냈을까?
덕분에 더불어 고생했던 리본이 그를 질책 어린 시선으로 바라봤다.
“어차피 마피아, 사회악이 하나 사라진 것뿐.”
“네 녀석이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 거냐?”
진정한 사회악은 네 녀석이잖아! 까놓고 말해서 보호비를 걷어가는 마피아와 세계대전을 준비하는 무쿠로 중 더 악에 가까운 건, 누가 뭐라고 해도 무쿠로다. 소소하게 따지고 들자면 오십보백보지만, 백보나 간 이가 오십보에 머문 이에게 빠르다고 말하는 만큼이나 어이없는 말이었다. 리본이 그런 황당함을 담아 눈으로 외쳤다. 그는 어깨를 으쓱거리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사실 그도 반디에르 패밀리를 괴멸시킬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처음 목적은 학대받고 있던 귀도 그레코를 빼돌리는 것, 그게 다였다. 일반인이었던 귀도를 빼내기도,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키기도 쉬웠다. 그래서 이참에 프랑도 옮기자. 그렇게 생각하고 찾아갔다가 결국 일을 저지르게 되었다. 반디에르 패밀리가 저지른 패악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환술에 특출한 프랑을 강제로 끌고 가려고 한 것, 다른 하나는 프랑을 귀한 실험체라고 한 것.
딱히 그 둘을 구해야 한다거나,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었다. 애초에 모르는 사이인데 그런 사람을 도울 정도로 착하지 않거니와 여유도 없다. 그러나 필연적으로 그 둘에게 손을 내민 건, 어느 날 갑자기 찾아든 기억 때문이다. 그리 머지않은 미래에 함께하는 모습에서 조금 일찍 둘에게 접근했었고, 결국 이렇게 구해주게 되었다. 일어날지, 일어나지 않을지 모르는 미래 따윈, 현재와 조금도 상관없는데도 그는 실체화까지 해서 그들을 구했었다.
어쩌면 무른 것도 전염되는 것일지 모른다. 둘을 구하면서 그런, 실없는 생각을 했었다.
“그렇군요, 알았습니다.”
“실마리가 잡힌 건가?”
“어쩌면.”
그렇기에 지금 더 화가 났다.
그는 그대로 크롬에게서 벗어났다. 그녀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하필이면 그 소식에 반응했었단다. 그래, 원인이 나라는 겁니까? 그래서 그렇게나 날 부른 겁니까? 자신을 부수면서까지? 그는 치밀어 오른 분노를 억누르며 츠나의 세계에 들어섰다.
그렇게 다시 찾은 사와다 츠나요시의 세계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덧없으리만치 아름다운 장미정원, 그 가운데에 있는 정자. 그는 저곳에 있다. 무쿠로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만나면 지금 이 분노를 모조리 쏟아 내리라. 그는 그렇게 다짐했다. 그러나 츠나의 모습을 발견한 순간 목까지 치밀어 올랐던 말이 싹 사라져 버렸다.
“왜 그러고 있는 겁니까.”
어차피 안 듣겠지만,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한심했다. 이런 식으로 내가 너와 얽혔다는 걸 후회하게 할 셈입니까? 잠깐이지만, 정말 진심으로 그런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그를 쫓아냈던 모습 그대로 서 있었다. 아니, 조금 다른 게 있다면 그를 쫓아낸 두 손을 가만히 노려보고 있었다. 자기가 쫓아냈으면서 자기 손을 원망하는 겁니까? 농담이 아니라 멱살이라도 잡고 뒤흔들고 싶다. 자신의 상태가 정상이었다면 정말 그랬을 것이다. 지금처럼 지친 상태에서 그와 접촉했다간 몰아치는 감정에 떠밀려 자신도 과거만을 쫓게 될 거다. 그 과거가 저주로 끝났다는 걸 알면서…….
그러니 이왕이면 말로 끝내고 싶었다. 분명히 옛날의 츠나라면 그의 말 한마디에 바들바들 떠는 모습을 보였을 텐데, 지금의 어디에서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기술을 익혀서 그가 말을 해도 똑바로 닿지 않는다. 저절로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너는 언제까지 날 실망시킬 생각입니까. 그는 성큼, 츠나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만 하는 게 어떻습니까? 그렇게 하찮은 과거에 얽매이다니 한심하군요.”
역시나 그는 듣지 않았다. 하지만 무쿠로의 말에 아주 조금이나마 반응했다. 고작 시선이 이동한 것에 불과하지만, 그게 어딘가 싶다. 모든 말이 들리긴 하되, 무시하는 걸까? 아니, 무쿠로의 입에서 나오는 진실이 듣기 싫은 거다.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은 거다. 원하는 말만 듣고 싶어서 들리지 않는 척하는 거다. 그렇게 그는 단순히 달콤하기만 했던 찰나의 과거만 그리며 현재를 부정한다. 그건 후회, 혹은 아득한 그리움 때문이다.
무쿠로도 한때 그랬던 적이 있어서 그의 심정을 아주 조금이나마 이해했다. 끝나지 않는 지옥을 방황하며 똑같은 감정을 느꼈었다. 그 끝에 그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공허, 오로지 그것만 남았다. 과거는 되돌릴 수 없다. 그러하니 차라리 전부 부숴버리리라. 그런 마음만이 남았다. 그때, 그에게는 아무것도 없기에 그런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넌 나와 다릅니다. 모든 것을 끌어안은 대공(大空)의 곁에 모인 이들을 어찌하려고 이러는 겁니까.
사와다 츠나요시는, 그만은 절대 이래선 안 된다.
“잊었습니까? 난 네 소망을 이뤄줬을 뿐입니다.”
무쿠로는 그의 이런 모습을 볼 바에야, 차라리 자기가 먼저 끝내기로 했다. 그가 후회하는 과거를, 그 상처를 헤집고 벌려서 그 마음을 죽이리라. 어쩐지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그때도, 지금도 이 마음이 그를 죽이는 독이라니! 그럼 없애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버릴 수밖에 없지 않은가? 갈기갈기 찢어서 죽이는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창백한 안색을 숨기며, 그는 특유의 비틀린 미소를 자아냈다.
그런 무쿠로의 마음을 그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자신의 소중한 것에 손을 댄다고 느끼리라. 아니나 다를까, 그가 분노에 가득 찬 눈으로 무쿠로를 직시했다. 건드리지 마, 눈으로 그리 말한다. 무쿠로의 예상과 똑같은 반응이다. 여기에서 멈출 생각이었으면 처음부터 꺼내지도 않았습니다. 이건 그에게도 상처지만, 무쿠로에게도 상처다.
“넌 왜 그런 것에 집착하는 겁니까? 과거는 되돌리지 못하기에 과거다.”
“…… 하지 마.”
“설마하니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겁니까? 그런 건 불가능합니다. 알지 않습니까.”
“하지 마.”
“넌, 모를 수 없습니다. 후회해도 돌아오는 건 없죠. 기억만이 남아서 마음을 괴롭히는 겁니다. 그런 건 그냥 잊어야 합니다. 왜, 아직 붙들고서 자신을 괴롭힙니까?”
“하지 마!”
그의 눈동자가 절망으로 비틀어진다. 조금씩 상처가 벌어진다.
무쿠로는 더없이 자상하게 웃었다. 그 이면에 숨겨진 적의가 뚜렷이 느껴질 정도로 가식적인 미소다. 그게 뭘 의미하는지, 그는 알고 있었다. 그가 뭔가 말을 하려고 입을 열지만, 단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뻣뻣이 굳어버렸다. 무쿠로는 그가 ‘왜’ 굳었는지 알면서도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이제부터 이렇게 그를 대해야 한다.
이건 누구의 상처를 헤집는 걸까요?
서로의 목을 조르고 있다. 지금의 상황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비참하기만 하니, 이제 끝내자. 무쿠로는 잔뜩 조롱하며 헤집어 벌린 상처 깊이 새로운 흉터를 새겼다.
“그게 아니면, 그 소망으로 죽은 날 동정하나요?”
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득히 펼쳐졌던 하늘부터 일그러진다. 파란 하늘이 새까만 어둠에 잠겨간다. 향긋하고 아름답던 장미는 산산이 흩어져 재가 된다. 섬세한 문양이 일품이던 정자의 기둥이 부러졌다. 천천히, 그의 세계는 그렇게 비틀려 사라지기 시작했다. 새까만 어둠으로 잠겨 든다. 저 어둠의 이름은 절망이리라.
무쿠로는 무너지는 정자의 끄트머리에서 우아하게 박수를 날렸다. 그건 누가 봐도 명확히 알 수 있는 조롱이었다. 물러도 이렇게 무를 수 있다니, 정말 놀랍습니다. 그는 그렇게 행동으로 말했다. 매몰차게 밀어낸다. 자신이 부서지는 와중에도 그가 있는 곳을 지켰었는데! 그는 마지막까지 츠나가 갈구하던 마음을 비웃었다. 그래도 그에게 말을 해야 한다. 이름 붙이지 못했던 그걸 알려줘야 한다. 다시 잃어버리기 전에, 츠나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네가…….”
무쿠로는 그 말을 듣지 않고 그의 세계에서 벗어났다. 그의 말 따윈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그렇게 사라졌다.
쫓아가야 한다. 아무리 상처받아도 그 말만은 전해야 한다. 사와다 츠나요시는 긴 잠에서 깨어났다.
환상세계와 현실의 시간은 다르다. 그건 개개인의 시간감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1분이라 느끼지만, 다른 누군가는 30초라 느낀다. 그게 환상세계에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다.
로쿠도 무쿠로가 바로 돌아온 이유도 그런 까닭이다. 현실로 따지자면, 고작 3초나 흘렀을까? 그 짧은 순간을 그리도 길게 느끼리만치 그는 괴로워했다는 말이었다. 무쿠로는 그런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입안이 씁쓸했다. 그런 상처를 다시 벌리고 새로운 상처를 그렸다. 복잡한 마음을 숨기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실체화했다. 놀란 크롬에게는 그냥 쉬라하고, 긴 한숨을 토해냈다. 리본도 갑작스러운 실체화에 놀란 듯, 그를 빤히 바라본다. 정황을 요구하는 시선이었지만, 그는 무시했다. 그럴 여건도 시간도 없다. 아니나 다를까, 저편에서 억눌린 살기가 터져 나왔다.
리본은 갑작스러운 살기에 기겁했다. 하필이면 츠나가 잠들어 있는 방에서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감각 상 바보 제자 외의 기척이 잡히지 않는다. 이 살기의 주인이 츠나라고? 그는 자신의 제자가 얼마나 물러 터졌는지 잘 안다. 아무리 심한 일을 겪었어도 투기는 몰라도 살기를 흘린 적은 없었다. 그래서 평생을 가도 살기라고는 모르려니 했었다. 그런 츠나가 이런 살기를? 츠나가 멍해졌을 때보다 더 충격이다.
이 녀석, 무슨 짓을 한 거냐!? 리본은 확신했다.
“무슨 짓을 한 거냐?!”
“글쎄요. 그가 정신 차리길 원하지 않았습니까?”
“어이!”
“곧 올 겁니다.”
무쿠로의 대답은 느긋하다. 리본이 옆에서 뭐라 외치건 말건 벽에 몸을 기댄다. 사흘간 기절했었지만, 피로는 여전했다. 조금이라도 쉬어두지 않으면 마음을 추스르지 못하리라. 잔뜩 화가 난 그가 들이닥치면 쉴 수 없다. 끝나고 기절하지만 않으면 다행이리라.
문이 잡아 뜯기듯 열리며 이성을 날려버린 츠나가 들이닥쳤다. 가라앉은 표정으로 돌아보지도 않고, 기척만으로 무쿠로를 찾아 멱살을 잡아챈다. 그리고 끌어당겨 시선을 맞춘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다. 잡힌 사람이나, 잡은 사람이나 고요히 서로 응시한다.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단지 그의 눈동자에는 전에 없던 살의가 가득하다. 그 너머에는 갈망이 있다. 아직 이로군요. 무쿠로는 그만 웃어버렸다. 잔뜩 비틀린 그 웃음은 모든 것을 부정하고, 거부했다. 역시 버려야만 하는 거군요. 아릿함이 그의 눈동자를 스쳐 갔지만, 제정신이 아닌 츠나는 그의 변화를 느끼지 못했다. 그저 잠시 방관자가 된 리본만이 그걸 알아차렸다. 이해하지 못할 감정의 충돌이다.
이윽고 무쿠로는 츠나를 만나기 전과 똑같이 불신과 경멸, 증오로 얼룩진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아프다는 듯, 츠나의 눈동자가 부서진다.
“네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나니까 가능한 말, 아닙니까?”
“웃기지 마!!”
그건 비통한 절규였다. 최후의 선을 앞에 둔 그는 필사적이었다. 무쿠로는 그게 아주 조금 애처롭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다. 그 위를 경멸이 뒤덮는다. 그 잔혹한 변화가 너무 뚜렷해서 츠나의 심장을 찔렀다.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놓을 수 없다며 강하게 부여잡는다. 그게 상대의 목을 조른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하고 필사적으로 밀어붙인다. 거짓이라도 좋으니까 그때로 돌아가길 원한다.
무쿠로는 일부러 길게 숨을 들이켰다. 숨쉬기가 불편하기도 했거니와, 주의를 끌어야 했다. 그러나 츠나는 끝내 그와 시선을 마주하지 않았다. 그의 말을 듣더라도 어렴풋이 어린 경멸을 견딜 수 없다는 듯, 시선만큼은 외면했다. 그는 혀를 차곤 시린 목소리를 흘려보낸다.
“너, 지금 네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알고 있습니까? 내가 누군지는 압니까? 그때와 지금이 다르다는 걸 아직도 모르겠습니까? 내 이름은 기억합니까? 내가 아는 넌 이렇지 않았습니다. 어리석고 무르지만, 강한 사람. 그런데 왜 이 모양이 되었습니까? 한심하게.”
“로쿠도 무쿠로!!”
“맞습니다. 그게 지금의 나. 하지만 넌 아직도 사와다 츠나요시가 아니군요.”
냉정하지만, 가볍게 이어가던 목소리가 싸늘하게 가라앉아 적의를 품는다. 차갑게 가라앉은 그의 눈동자에는 일말의 상냥함도 깃들여 있지 않았다. 목소리에까지 참혹한 경멸로 들어찼다. 그 사실을 깨달은 츠나의 손에 힘이 풀렸다. 이건 진심이다. 그의 초직감이 그렇게 가르쳐준다. 아냐, 이런 걸 바라지 않았어. 어째서? 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다. 전부 잃은 듯, 망연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귀를 막았다. 무쿠로의 환멸 어린 눈빛을, 경멸 어린 목소리를 마주하기 싫었다.
휘청거리는 몸을 가누지 못한 그에게 다시금 냉혹한 목소리가 박힌다.
“역시 안개의 수호자 따위, 무슨 일이 있더라도 맡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게 지금의 내 ‘후회’입니다. 무슨 의미인지 아시겠습니까?”
거짓말. 츠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입을 열어도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지 마, 네가 그래선 안 돼. 천천히 모든 것이 비틀리며 일그러진다. 자신이 왜 과거에 집착했던가, 왜 그 시절을 그리도 그리워했던가? 그때와 지금은 다르다. 모든 것이 변해버렸다. 그걸 확실하게 느꼈다. 곁에 있었다. 언제나 아닌 듯 상냥하게 있어주었다. 그런 너를 다시 잃었다. 잘못된 걸 바라였나? 내 착각이었나? 아니, 우리는 변하지 않았잖아. 너도 그대로였잖아. 말해야 한다. 너를 되찾으려면 그 단 한마디를 전해야 한다.
힘겹게 열리는 그의 입을 막듯, 무쿠로가 그를 기절시켰다.
무쿠로는 무너지는 그의 몸을 받아 한쪽 침대에 곱게 눕혔다. 마지막, 그가 하려던 말이 무엇일지 쉬이 예상할 수 있었다. 그래서 형태도 갖지 못하도록 막았다. 전부 고의였다. 그럼에도 그건 살아서 스스로 형태를 만든다. 뻔뻔하게 무쿠로의 머릿속 한구석을 차지한다. 어리석으리만치 확고하게 틀어박힌다. 애써 외면하던 것들이 때맞춰 무의식이 좁다며 뛰쳐나오려 한다. 무쿠로는 무의식의 위를 몇 번이고 거짓으로 덧씌우며, 모르는 척 예의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리본의 입에서 상황을 설명하라는 말이 나오기 전에 시원한 미소로 보고했다. 너무 상큼한 미소라 리본이 저도 모르게 걱정할 정도였다. 너무 무리시켰나? 능력을 너무 써서 어디가 잘못된 건가? 리본이 절로 그리 생각할 정도로 환하게 웃었다. 묘한 비장함이 양념으로 얹어졌다. 리본의 입에서 나오려던 걱정을 가로막으며 그가 경쾌하게 말한다.
“이제 정신을 차릴 겁니다.”
“…… 어떻게 된 일인지 묻고 싶은데?”
“불행히도 가능성에 가까우니, 이 아이들을 잠시 더 부탁하죠.”
“어이.”
“그럼 이만…….”
화사하게 웃는 얼굴로 무쿠로는 쌩하니 사라졌다. 이번에도 저 할 말만 한다. 리본은 저번처럼 화나지 않았다. 그냥, 앞으로는 적당히 일을 시켜야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위화감이 굉장했다. 어여쁘게 웃는 무쿠로라니! 꿈에 나올까 무섭다. 게다가 시급히 사라지는 꼴이 마치 도망친 것처럼 느껴졌으니……. 그렇게나 힘들었나 싶다.
유추 과정이 조금 틀렸지만, 리본이 생각대로 그는 정말 피곤했다. 프랑을 잡아가려던 마피아를 쓴다고, 실체화했었다. 그 직후, 2개월간 츠나에게 붙들려서 조금도 쉬지 못했다. 방심했다간 그 감정의 파도에 휘말렸으리라. 거기에 애들을 구하려고 일시적이나마 실체화를 해야 했었고, 다시 츠나에게 붙들렸었다. 그러다가 강제 추방으로 기절, 힘의 손실이 생길 정도로 위험한 일이었다. 이때 비록 사흘이란 시간 동안 쉴 수 있었지만, 거의 바로 츠나의 정신과 접촉해야 했고, 다시 실체화해야 했다.
종합하자면, 총 2개월 하고도 나흘간 계속 깨어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것도 힘을 써가면서.
무쿠로는 진짜 죽을 만큼, 이대로 잠들어 깨지 않아도 좋을 만큼 피곤했다. 이제 쉴 수 있다! 일단, 츠나의 상태를 원래대로 돌려놓은 셈이니 푹 쉬어도 되리라. 아니, 누가 뭐라고 해도 쉴 거다! 아무리 초인으로 보여도, 그는 인간이다. 그리고 인간은 적당히 쉬어야만 한다.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모든 걸 잊고, 그는 기절했다.
그가 간신히 잠에서 깨어난 건 그로부터 나흘 후였다.
2달 이상 깨어 있는 시점에서 이미 초인인 것 같지만, 넘어가주세요!
왜 이렇게 긴지 모르겠네요.
그냥 넣고 싶은 걸 너무 우겨넣었나?
속마음에 대한 걸 안쓰면 데레가 보이지 않는 무쿠로입니다.
왜 이렇게 츤츤거리는 지... 쉽게 데레가 될 생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만 츤츤거려...
덧붙이자면, 리본은 정말 예리할거 같습니다.
네.
뒷부분은 대대적으로 수정했습니다.
묘하게 문체가 변한 것 같으면 수정한 부분입니다.
글 쓸 때마다 상태가 달라지면 문체도 변합니다.
들죽날죽인게 문제네요.
인생은 예측불허라더니… 지금은 무한대로 지지부진 상태입니다.
쓰고 싶던 부분을 쓰는데 왜 지지부진 일까요?
때때로 진심과 소망은 다르다. 마음이 원하는 대로 바랄 수 없기에 인생은 재미있다. 한때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네 진심과 소망이 다르다는 걸 알면서도 이뤄주겠다고 했다. 네가 결국 소망을 택하리라는 걸 알면서 그렇게 말했다. 수단을 가리지 않고 결과만을 위해 움직였다. 그게 널 부수리라는 것쯤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나라는 존재가 결국 널 죽이는 맹독이 된다고 확신했다. 그 시점에서 널 떠났어야 했다.
난 그러지 못했고, 넌 결국 죽었다.
‘내 손으로 널 죽였다.’
일그러진 상념이 머릿속을 잠식한다. 감정을 흔들어 애써 억누르고 있던 과거를 갈구한다. 무엇을 위해서? 과거는 과거일 뿐, 후회와 탄식으로 뒤범벅된 그게 뭐가 그리 좋다고 계속 찾으려 하는 걸까? 그런 건 필요 없다. 가치 없는 일이다. 모두 잊어버리면 끝나는 몽상에 불과하다.
로쿠도 무쿠로는 그렇게 자신을 뒤흔드는 모든 생각을 무의식의 저편에 구겨 넣었다. 그리고 차근히 자신의 상태를 관조했다. 타인의 세계에서 강제로 내쫓겼다. 어쩌면 힘의 반, 그 이상을 잃었을 수 있다. 아니, 죽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어쩌면 그때의 여파로 몇 년이나 기절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건 가정할 수 있는 상황 중 정말 최악의 상황이다. 그런 여러 경우의 수를 따지며 자신을 관조한 끝에, 그는 자신의 상태가 굉장히 멀쩡하다는 걸 깨달았다. 힘의 손실도 거의 없을뿐더러, 잘 모르긴 해도 며칠 흐르지 않은 것 같다. 기껏해야 1주일? 어쩌면 하루다.
‘넌 그런 상태가 되어서도 상냥하군요.’
그럼 정확하게 얼마나 지났을까? 빛도 닿지 않는 빈디체의 감옥에서 알 수 없으니, 일단 크롬에게 가자. 그래서 사와다 츠나요시의 상태를 살피자. 그는 그렇게 결정했다.
무쿠로가 그렇게 결정할 때쯤, 크롬은 사흘째 츠나의 집에서 푹 쉬고 있었다.
그건 다 리본이 약속은 약속이라며 여러모로 편의를 봐준 덕이다. 물론 리본은 말만 하고 전부 츠나요시의 어머니인 나나가 해줬다. 식사는 물론이고 잠자리, 의복까지 꼼꼼히 챙겨주셔서, 고쿠요 랜드의 생활과 비교도 할 수 없으리만치 훌륭해졌다. 그녀의 자상한 관심 덕에 크롬도 어느 틈엔가 그녀를 마망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만큼 크롬의 몸은 편해졌지만, 마음은 불편했다. 츠나의 집에 신세를 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무쿠로의 말에 따른 것이니 그에 따른 불만 같은 건 조금도 없었다. 오히려 그만큼 자신에게 관심을 둔다는 사실이 기뻤었다. 하지만 불안한 마음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그건 간신히 닿았던 그와의 연락이 다시 끊겼기 때문이다. 어째서? 무쿠로님, 왜 대답해주지 않으세요? 인내심이 부족한 켄은 그녀를 닦달하다가 신경질을 내며 과자나 사러 나갔다. 치쿠사도 그를 밤새 기다리다 이제야 간신히 선잠이 들었다.
‘무쿠로님…….’
다시 불러보지만 닿지 않는다. 그녀는 잔뜩 풀이 죽어 그와 이어진 증거인 창을 꼭 끌어안았다.
리본이 그녀에게 말을 건 건 그쯤이었다.
“무쿠로와의 연락은 아직 인가 보군.”
기척도 없이 나타난 그의 질문에 그녀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신경 쓰던 사실을 지적당한 탓인지, 그녀의 표정이 한층 어두워진다. 역시 무슨 일이 있었던 거로군. 리본은 그렇게 확신하며 그녀에게 다가섰다.
켄과 치쿠사는 마피아에 대한 경계가 심해서 협조라고는 조금도 하지 않는다. 그건 소젝토(Soggetto : 실험체)가 되었던 시절의 역작용이리라. 무쿠로는 그보다 심해서 필요한 정보도 흘리지 않는다. 녀석만 믿다가는 엿 먹을 가능성이 컸다. 아니, 적어도 조금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 이쪽에서도 대처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일부러 크롬이 혼자가 된 지금 온 것이다. 크롬은 그렇게까지 경계가 심하지 않으니까.
리본은 흘리듯, 가장 궁금한 걸 물었다.
“무쿠로와의 연락이 끊겼었던 거냐?”
“응…….”
“언제부터?”
“2개월 전쯤부터…….”
"이유는?"
"몰라."
그녀는 시무룩한 얼굴로 창을 어루만졌다.
2개월 전, [급한 일이 생겨서 연락을 못 할 수 있습니다. 연락이 끊기더라도 당황하지 말고 기다리세요.]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그와의 연락이 끊겼었다. 그녀가 아는 건 그게 전부다. 연락이 끊길 수 있다는 게 무서웠지만, 그래도 곧 일을 처리하고 돌아오리라. 무쿠로님은 강하시니까. 그녀는 그렇게 믿고 기다렸다. 그렇게 연락이 끊기고 1달이 흐르자 점점 무서워졌었다. 혹시 그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아니, 그럴 리 없다. 그냥 일이 지연되고 있는 거겠지. 그렇게 믿었지만, 불안함이 가시지 않았다.
연락이 끊기더라도 당황하지 말고 기다리세요.
반복해서 머릿속에 울리는 그의 목소리. 사라지지 않는 창과 자신의 생존이 그의 무사함을 알려줬기에 그저 믿으며 기다렸었다. 시간은 야속하게 흘러갔다. 기어코 기다림에 지친 그녀가 매일 그를 불렀다. 부디 자신의 목소리가 그에게 닿길 바라며 애타게 찾았다. 그러나 아무리 그를 불러도, 누군가가 중간에서 방해하는 것처럼 끝내 닿지 않았다. 결국, 그녀의 위험을 느낀 그가 올 때까지의 2개월간 막연한 기다림이 주는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그녀의 목소리가 그에게 닿지 않는다.
'무쿠로님…….'
[나의 귀여운 크롬, 이제 몸은 좀 괜찮습니까?]
그토록 기다리던 목소리다. 다정다감한 그의 목소리에 그녀의 안색이 밝아졌다. 물어보고 싶은 말이 정말 많았지만, 목이 메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냥 그가 와 주었다는 사실이 기뻐서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는 어린아이처럼 몇 번이고 반복해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진짜 그가 바로 곁에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무쿠로님! 그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그녀의 부름에 응했다.
[많이 무서웠나 보군요. 이제 괜찮습니다, 나의 크롬.]
‘네, 네!’
그녀는 그제야 간신히 웃을 수 있었다.
크롬은 원래 표정변화가 드물었다. 그렇다 보니 조금 웃는 것만으로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쉬이 짐작할 수 있다. 특히나 조금 전까지 어둡던 표정이 밝아졌으니, 그게 의미하는 건 하나다. 순식간에 상황을 판단한 리본은 조금 의외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1, 2주는 지나야 얼굴을 비추리라 생각했는데, 고작 사흘 만에 나타나다니 말이다. 그래도 일찍 나타나서 다행이다. 리본이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지금 츠나의 상태는 나빴다.
아무리 급해도 상대의 사정을 헤아리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그렇기에 리본은 둘의 해후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 조금 여유시간을 가졌다.
“무쿠로가 온 거냐?”
“으, 응.”
크롬이 살짝 울먹이며 고개를 끄덕인다.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그만큼 그녀의 마음고생이 심했다는 것이리라. 그게 안쓰러웠지만, 더는 시간을 할애해 줄 수 없었다. 그 리본이 조금 조급해질 정도로, 고작 그 며칠 사이에 츠나의 상태는 심각해졌다.
처음에는 그냥 멍하니 넋을 빼놓고 있었는데, 지금은 갑작스럽게 기절하듯 잠드는 경우도 생겼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건 애교다. 난데없이 자해하기도 하고, 가스레인지의 불을 보고 발작해서 물을 끼얹으려 한 적도 있었다. 어제만 해도 종일 넋 놓은 상태로 거리를 싸돌아다녔다. 그런 일이 반복될수록 츠나가 버틸 수 있는 한계가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점점 끝이 다가오는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었다. 문제는 그런 예감일수록 잘 맞아떨어진다는 거지. 리본은 입술을 질근 깨물었다. 이대로 제자를 잃을 수 없다.
“무쿠로, 이제 계약을 이행해라.”
이제는 그를 재촉하는 수밖에 없다.
리본이 자세한 사정을 말한 건 아니지만,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짐작한 그가 크롬과 자리를 바꿨다. 물론, 실체화는 하지 않았다. 고작 대화만 하는데 그렇게 힘을 소비할 여유는 없다. 이미 딱딱하게 굳은 리본의 표정만큼, 그의 표정도 싸하게 굳어 있었다.
“사흘이 지난 게 맞습니까?”
“크롬을 부탁한 시간이라면 맞다. 그건 왜 묻지?”
“필요해서, 입니다. 그럼 2개월쯤 전에 봉골레가 접한 소식을 말해주시겠습니까?”
“꽤 구체적인 날짜군. 벌써 접촉했던 거냐?”
“마피아와의 거래 따위를, 오래 할 생각 없습니다.”
무쿠로이기에 이해가 가는 이유다. 어차피 리본과 그의 사이는 불신의 골이 깊다. 더 확실하게 말하자면, 리본이 믿는 건 그의 실력밖에 없다. 최강의 아기라 불리는 아르꼬발레노 바이퍼를 압도적으로 물리쳤으니 그것만은 믿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다가 하필이면 요구하는 것이 2개월 전이다. 2개월 전이라면 그가 크롬과 연락이 끊겼던 시점이지 않나? 역시 무슨 관련이 있는 걸까? 한번 의구심이 들자 점점 미덥지 않아졌다. 그간의 행적이 그의 그런 마음을 가중시킨다. 리본은 진짜 그런 게 필요 하느냐는 의미가 가득한 시선으로 그를 노려봤다.
그가 슬쩍 고개를 끄덕인다. 딱히 속이는 기색도 없고, 조금 생각해보니 특별할 것도 없는 자료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서야, 리본은 천천히 기억을 더듬었다.
“그쯤이라면 특별한 일이 없었다. 하나 있다면, 네 녀석이 반디에르 패밀리를 괴멸시켰다는 게 다다.”
“…… 그것뿐입니까?”
“그래.”
그때의 일을 떠올리며 리본은 날카롭게 그를 노려봤다. 빈디체의 감옥에 아직 갇혀 있으면서 멋대로 날뛰다니! 그가 츠나의 수호자라는 건 비밀이 아닌지라, 곧 사방에서 항의가 쏟아졌었다. 반디에르 패밀리가 괴멸되어야 했던 이유를 설명해 달라는 건 기본이고, 빈디체의 감옥에 갇힌 자가 이렇게 날뛰어도 되느냐, 빈디체가 제 역할을 못하는 거 아니냐는 항의도 있었다. 반디에르 패밀리에서 혹시 봉골레 패밀리에게 반기를 들었던 적이 있느냐면서, 배신자 제거의 일환이냐…… 하나하나 언급하자면 끝도 없었다. 9대가 이리저리 움직여 간신히 흐지부지 시켰지만, 그 당시의 일은 그냥 악몽이다. 오죽하면 9대가 리본에게 앞으로는 수호자의 일에도 신경을 써달라는 편지를 보냈을까?
덕분에 더불어 고생했던 리본이 그를 질책 어린 시선으로 바라봤다.
“어차피 마피아, 사회악이 하나 사라진 것뿐.”
“네 녀석이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 거냐?”
진정한 사회악은 네 녀석이잖아! 까놓고 말해서 보호비를 걷어가는 마피아와 세계대전을 준비하는 무쿠로 중 더 악에 가까운 건, 누가 뭐라고 해도 무쿠로다. 소소하게 따지고 들자면 오십보백보지만, 백보나 간 이가 오십보에 머문 이에게 빠르다고 말하는 만큼이나 어이없는 말이었다. 리본이 그런 황당함을 담아 눈으로 외쳤다. 그는 어깨를 으쓱거리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사실 그도 반디에르 패밀리를 괴멸시킬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처음 목적은 학대받고 있던 귀도 그레코를 빼돌리는 것, 그게 다였다. 일반인이었던 귀도를 빼내기도,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키기도 쉬웠다. 그래서 이참에 프랑도 옮기자. 그렇게 생각하고 찾아갔다가 결국 일을 저지르게 되었다. 반디에르 패밀리가 저지른 패악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환술에 특출한 프랑을 강제로 끌고 가려고 한 것, 다른 하나는 프랑을 귀한 실험체라고 한 것.
딱히 그 둘을 구해야 한다거나,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었다. 애초에 모르는 사이인데 그런 사람을 도울 정도로 착하지 않거니와 여유도 없다. 그러나 필연적으로 그 둘에게 손을 내민 건, 어느 날 갑자기 찾아든 기억 때문이다. 그리 머지않은 미래에 함께하는 모습에서 조금 일찍 둘에게 접근했었고, 결국 이렇게 구해주게 되었다. 일어날지, 일어나지 않을지 모르는 미래 따윈, 현재와 조금도 상관없는데도 그는 실체화까지 해서 그들을 구했었다.
어쩌면 무른 것도 전염되는 것일지 모른다. 둘을 구하면서 그런, 실없는 생각을 했었다.
“그렇군요, 알았습니다.”
“실마리가 잡힌 건가?”
“어쩌면.”
그렇기에 지금 더 화가 났다.
그는 그대로 크롬에게서 벗어났다. 그녀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하필이면 그 소식에 반응했었단다. 그래, 원인이 나라는 겁니까? 그래서 그렇게나 날 부른 겁니까? 자신을 부수면서까지? 그는 치밀어 오른 분노를 억누르며 츠나의 세계에 들어섰다.
그렇게 다시 찾은 사와다 츠나요시의 세계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덧없으리만치 아름다운 장미정원, 그 가운데에 있는 정자. 그는 저곳에 있다. 무쿠로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만나면 지금 이 분노를 모조리 쏟아 내리라. 그는 그렇게 다짐했다. 그러나 츠나의 모습을 발견한 순간 목까지 치밀어 올랐던 말이 싹 사라져 버렸다.
“왜 그러고 있는 겁니까.”
어차피 안 듣겠지만,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한심했다. 이런 식으로 내가 너와 얽혔다는 걸 후회하게 할 셈입니까? 잠깐이지만, 정말 진심으로 그런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그를 쫓아냈던 모습 그대로 서 있었다. 아니, 조금 다른 게 있다면 그를 쫓아낸 두 손을 가만히 노려보고 있었다. 자기가 쫓아냈으면서 자기 손을 원망하는 겁니까? 농담이 아니라 멱살이라도 잡고 뒤흔들고 싶다. 자신의 상태가 정상이었다면 정말 그랬을 것이다. 지금처럼 지친 상태에서 그와 접촉했다간 몰아치는 감정에 떠밀려 자신도 과거만을 쫓게 될 거다. 그 과거가 저주로 끝났다는 걸 알면서…….
그러니 이왕이면 말로 끝내고 싶었다. 분명히 옛날의 츠나라면 그의 말 한마디에 바들바들 떠는 모습을 보였을 텐데, 지금의 어디에서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기술을 익혀서 그가 말을 해도 똑바로 닿지 않는다. 저절로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너는 언제까지 날 실망시킬 생각입니까. 그는 성큼, 츠나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만 하는 게 어떻습니까? 그렇게 하찮은 과거에 얽매이다니 한심하군요.”
역시나 그는 듣지 않았다. 하지만 무쿠로의 말에 아주 조금이나마 반응했다. 고작 시선이 이동한 것에 불과하지만, 그게 어딘가 싶다. 모든 말이 들리긴 하되, 무시하는 걸까? 아니, 무쿠로의 입에서 나오는 진실이 듣기 싫은 거다.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은 거다. 원하는 말만 듣고 싶어서 들리지 않는 척하는 거다. 그렇게 그는 단순히 달콤하기만 했던 찰나의 과거만 그리며 현재를 부정한다. 그건 후회, 혹은 아득한 그리움 때문이다.
무쿠로도 한때 그랬던 적이 있어서 그의 심정을 아주 조금이나마 이해했다. 끝나지 않는 지옥을 방황하며 똑같은 감정을 느꼈었다. 그 끝에 그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공허, 오로지 그것만 남았다. 과거는 되돌릴 수 없다. 그러하니 차라리 전부 부숴버리리라. 그런 마음만이 남았다. 그때, 그에게는 아무것도 없기에 그런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넌 나와 다릅니다. 모든 것을 끌어안은 대공(大空)의 곁에 모인 이들을 어찌하려고 이러는 겁니까.
사와다 츠나요시는, 그만은 절대 이래선 안 된다.
“잊었습니까? 난 네 소망을 이뤄줬을 뿐입니다.”
무쿠로는 그의 이런 모습을 볼 바에야, 차라리 자기가 먼저 끝내기로 했다. 그가 후회하는 과거를, 그 상처를 헤집고 벌려서 그 마음을 죽이리라. 어쩐지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그때도, 지금도 이 마음이 그를 죽이는 독이라니! 그럼 없애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버릴 수밖에 없지 않은가? 갈기갈기 찢어서 죽이는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창백한 안색을 숨기며, 그는 특유의 비틀린 미소를 자아냈다.
그런 무쿠로의 마음을 그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자신의 소중한 것에 손을 댄다고 느끼리라. 아니나 다를까, 그가 분노에 가득 찬 눈으로 무쿠로를 직시했다. 건드리지 마, 눈으로 그리 말한다. 무쿠로의 예상과 똑같은 반응이다. 여기에서 멈출 생각이었으면 처음부터 꺼내지도 않았습니다. 이건 그에게도 상처지만, 무쿠로에게도 상처다.
“넌 왜 그런 것에 집착하는 겁니까? 과거는 되돌리지 못하기에 과거다.”
“…… 하지 마.”
“설마하니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겁니까? 그런 건 불가능합니다. 알지 않습니까.”
“하지 마.”
“넌, 모를 수 없습니다. 후회해도 돌아오는 건 없죠. 기억만이 남아서 마음을 괴롭히는 겁니다. 그런 건 그냥 잊어야 합니다. 왜, 아직 붙들고서 자신을 괴롭힙니까?”
“하지 마!”
그의 눈동자가 절망으로 비틀어진다. 조금씩 상처가 벌어진다.
무쿠로는 더없이 자상하게 웃었다. 그 이면에 숨겨진 적의가 뚜렷이 느껴질 정도로 가식적인 미소다. 그게 뭘 의미하는지, 그는 알고 있었다. 그가 뭔가 말을 하려고 입을 열지만, 단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뻣뻣이 굳어버렸다. 무쿠로는 그가 ‘왜’ 굳었는지 알면서도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이제부터 이렇게 그를 대해야 한다.
이건 누구의 상처를 헤집는 걸까요?
서로의 목을 조르고 있다. 지금의 상황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비참하기만 하니, 이제 끝내자. 무쿠로는 잔뜩 조롱하며 헤집어 벌린 상처 깊이 새로운 흉터를 새겼다.
“그게 아니면, 그 소망으로 죽은 날 동정하나요?”
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득히 펼쳐졌던 하늘부터 일그러진다. 파란 하늘이 새까만 어둠에 잠겨간다. 향긋하고 아름답던 장미는 산산이 흩어져 재가 된다. 섬세한 문양이 일품이던 정자의 기둥이 부러졌다. 천천히, 그의 세계는 그렇게 비틀려 사라지기 시작했다. 새까만 어둠으로 잠겨 든다. 저 어둠의 이름은 절망이리라.
무쿠로는 무너지는 정자의 끄트머리에서 우아하게 박수를 날렸다. 그건 누가 봐도 명확히 알 수 있는 조롱이었다. 물러도 이렇게 무를 수 있다니, 정말 놀랍습니다. 그는 그렇게 행동으로 말했다. 매몰차게 밀어낸다. 자신이 부서지는 와중에도 그가 있는 곳을 지켰었는데! 그는 마지막까지 츠나가 갈구하던 마음을 비웃었다. 그래도 그에게 말을 해야 한다. 이름 붙이지 못했던 그걸 알려줘야 한다. 다시 잃어버리기 전에, 츠나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네가…….”
무쿠로는 그 말을 듣지 않고 그의 세계에서 벗어났다. 그의 말 따윈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그렇게 사라졌다.
쫓아가야 한다. 아무리 상처받아도 그 말만은 전해야 한다. 사와다 츠나요시는 긴 잠에서 깨어났다.
환상세계와 현실의 시간은 다르다. 그건 개개인의 시간감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1분이라 느끼지만, 다른 누군가는 30초라 느낀다. 그게 환상세계에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다.
로쿠도 무쿠로가 바로 돌아온 이유도 그런 까닭이다. 현실로 따지자면, 고작 3초나 흘렀을까? 그 짧은 순간을 그리도 길게 느끼리만치 그는 괴로워했다는 말이었다. 무쿠로는 그런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입안이 씁쓸했다. 그런 상처를 다시 벌리고 새로운 상처를 그렸다. 복잡한 마음을 숨기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실체화했다. 놀란 크롬에게는 그냥 쉬라하고, 긴 한숨을 토해냈다. 리본도 갑작스러운 실체화에 놀란 듯, 그를 빤히 바라본다. 정황을 요구하는 시선이었지만, 그는 무시했다. 그럴 여건도 시간도 없다. 아니나 다를까, 저편에서 억눌린 살기가 터져 나왔다.
리본은 갑작스러운 살기에 기겁했다. 하필이면 츠나가 잠들어 있는 방에서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감각 상 바보 제자 외의 기척이 잡히지 않는다. 이 살기의 주인이 츠나라고? 그는 자신의 제자가 얼마나 물러 터졌는지 잘 안다. 아무리 심한 일을 겪었어도 투기는 몰라도 살기를 흘린 적은 없었다. 그래서 평생을 가도 살기라고는 모르려니 했었다. 그런 츠나가 이런 살기를? 츠나가 멍해졌을 때보다 더 충격이다.
이 녀석, 무슨 짓을 한 거냐!? 리본은 확신했다.
“무슨 짓을 한 거냐?!”
“글쎄요. 그가 정신 차리길 원하지 않았습니까?”
“어이!”
“곧 올 겁니다.”
무쿠로의 대답은 느긋하다. 리본이 옆에서 뭐라 외치건 말건 벽에 몸을 기댄다. 사흘간 기절했었지만, 피로는 여전했다. 조금이라도 쉬어두지 않으면 마음을 추스르지 못하리라. 잔뜩 화가 난 그가 들이닥치면 쉴 수 없다. 끝나고 기절하지만 않으면 다행이리라.
문이 잡아 뜯기듯 열리며 이성을 날려버린 츠나가 들이닥쳤다. 가라앉은 표정으로 돌아보지도 않고, 기척만으로 무쿠로를 찾아 멱살을 잡아챈다. 그리고 끌어당겨 시선을 맞춘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다. 잡힌 사람이나, 잡은 사람이나 고요히 서로 응시한다.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단지 그의 눈동자에는 전에 없던 살의가 가득하다. 그 너머에는 갈망이 있다. 아직 이로군요. 무쿠로는 그만 웃어버렸다. 잔뜩 비틀린 그 웃음은 모든 것을 부정하고, 거부했다. 역시 버려야만 하는 거군요. 아릿함이 그의 눈동자를 스쳐 갔지만, 제정신이 아닌 츠나는 그의 변화를 느끼지 못했다. 그저 잠시 방관자가 된 리본만이 그걸 알아차렸다. 이해하지 못할 감정의 충돌이다.
이윽고 무쿠로는 츠나를 만나기 전과 똑같이 불신과 경멸, 증오로 얼룩진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아프다는 듯, 츠나의 눈동자가 부서진다.
“네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나니까 가능한 말, 아닙니까?”
“웃기지 마!!”
그건 비통한 절규였다. 최후의 선을 앞에 둔 그는 필사적이었다. 무쿠로는 그게 아주 조금 애처롭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다. 그 위를 경멸이 뒤덮는다. 그 잔혹한 변화가 너무 뚜렷해서 츠나의 심장을 찔렀다.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놓을 수 없다며 강하게 부여잡는다. 그게 상대의 목을 조른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하고 필사적으로 밀어붙인다. 거짓이라도 좋으니까 그때로 돌아가길 원한다.
무쿠로는 일부러 길게 숨을 들이켰다. 숨쉬기가 불편하기도 했거니와, 주의를 끌어야 했다. 그러나 츠나는 끝내 그와 시선을 마주하지 않았다. 그의 말을 듣더라도 어렴풋이 어린 경멸을 견딜 수 없다는 듯, 시선만큼은 외면했다. 그는 혀를 차곤 시린 목소리를 흘려보낸다.
“너, 지금 네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알고 있습니까? 내가 누군지는 압니까? 그때와 지금이 다르다는 걸 아직도 모르겠습니까? 내 이름은 기억합니까? 내가 아는 넌 이렇지 않았습니다. 어리석고 무르지만, 강한 사람. 그런데 왜 이 모양이 되었습니까? 한심하게.”
“로쿠도 무쿠로!!”
“맞습니다. 그게 지금의 나. 하지만 넌 아직도 사와다 츠나요시가 아니군요.”
냉정하지만, 가볍게 이어가던 목소리가 싸늘하게 가라앉아 적의를 품는다. 차갑게 가라앉은 그의 눈동자에는 일말의 상냥함도 깃들여 있지 않았다. 목소리에까지 참혹한 경멸로 들어찼다. 그 사실을 깨달은 츠나의 손에 힘이 풀렸다. 이건 진심이다. 그의 초직감이 그렇게 가르쳐준다. 아냐, 이런 걸 바라지 않았어. 어째서? 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다. 전부 잃은 듯, 망연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귀를 막았다. 무쿠로의 환멸 어린 눈빛을, 경멸 어린 목소리를 마주하기 싫었다.
휘청거리는 몸을 가누지 못한 그에게 다시금 냉혹한 목소리가 박힌다.
“역시 안개의 수호자 따위, 무슨 일이 있더라도 맡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게 지금의 내 ‘후회’입니다. 무슨 의미인지 아시겠습니까?”
거짓말. 츠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입을 열어도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지 마, 네가 그래선 안 돼. 천천히 모든 것이 비틀리며 일그러진다. 자신이 왜 과거에 집착했던가, 왜 그 시절을 그리도 그리워했던가? 그때와 지금은 다르다. 모든 것이 변해버렸다. 그걸 확실하게 느꼈다. 곁에 있었다. 언제나 아닌 듯 상냥하게 있어주었다. 그런 너를 다시 잃었다. 잘못된 걸 바라였나? 내 착각이었나? 아니, 우리는 변하지 않았잖아. 너도 그대로였잖아. 말해야 한다. 너를 되찾으려면 그 단 한마디를 전해야 한다.
힘겹게 열리는 그의 입을 막듯, 무쿠로가 그를 기절시켰다.
무쿠로는 무너지는 그의 몸을 받아 한쪽 침대에 곱게 눕혔다. 마지막, 그가 하려던 말이 무엇일지 쉬이 예상할 수 있었다. 그래서 형태도 갖지 못하도록 막았다. 전부 고의였다. 그럼에도 그건 살아서 스스로 형태를 만든다. 뻔뻔하게 무쿠로의 머릿속 한구석을 차지한다. 어리석으리만치 확고하게 틀어박힌다. 애써 외면하던 것들이 때맞춰 무의식이 좁다며 뛰쳐나오려 한다. 무쿠로는 무의식의 위를 몇 번이고 거짓으로 덧씌우며, 모르는 척 예의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리본의 입에서 상황을 설명하라는 말이 나오기 전에 시원한 미소로 보고했다. 너무 상큼한 미소라 리본이 저도 모르게 걱정할 정도였다. 너무 무리시켰나? 능력을 너무 써서 어디가 잘못된 건가? 리본이 절로 그리 생각할 정도로 환하게 웃었다. 묘한 비장함이 양념으로 얹어졌다. 리본의 입에서 나오려던 걱정을 가로막으며 그가 경쾌하게 말한다.
“이제 정신을 차릴 겁니다.”
“…… 어떻게 된 일인지 묻고 싶은데?”
“불행히도 가능성에 가까우니, 이 아이들을 잠시 더 부탁하죠.”
“어이.”
“그럼 이만…….”
화사하게 웃는 얼굴로 무쿠로는 쌩하니 사라졌다. 이번에도 저 할 말만 한다. 리본은 저번처럼 화나지 않았다. 그냥, 앞으로는 적당히 일을 시켜야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위화감이 굉장했다. 어여쁘게 웃는 무쿠로라니! 꿈에 나올까 무섭다. 게다가 시급히 사라지는 꼴이 마치 도망친 것처럼 느껴졌으니……. 그렇게나 힘들었나 싶다.
유추 과정이 조금 틀렸지만, 리본이 생각대로 그는 정말 피곤했다. 프랑을 잡아가려던 마피아를 쓴다고, 실체화했었다. 그 직후, 2개월간 츠나에게 붙들려서 조금도 쉬지 못했다. 방심했다간 그 감정의 파도에 휘말렸으리라. 거기에 애들을 구하려고 일시적이나마 실체화를 해야 했었고, 다시 츠나에게 붙들렸었다. 그러다가 강제 추방으로 기절, 힘의 손실이 생길 정도로 위험한 일이었다. 이때 비록 사흘이란 시간 동안 쉴 수 있었지만, 거의 바로 츠나의 정신과 접촉해야 했고, 다시 실체화해야 했다.
종합하자면, 총 2개월 하고도 나흘간 계속 깨어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것도 힘을 써가면서.
무쿠로는 진짜 죽을 만큼, 이대로 잠들어 깨지 않아도 좋을 만큼 피곤했다. 이제 쉴 수 있다! 일단, 츠나의 상태를 원래대로 돌려놓은 셈이니 푹 쉬어도 되리라. 아니, 누가 뭐라고 해도 쉴 거다! 아무리 초인으로 보여도, 그는 인간이다. 그리고 인간은 적당히 쉬어야만 한다.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모든 걸 잊고, 그는 기절했다.
그가 간신히 잠에서 깨어난 건 그로부터 나흘 후였다.
왜 이렇게 긴지 모르겠네요.
그냥 넣고 싶은 걸 너무 우겨넣었나?
속마음에 대한 걸 안쓰면 데레가 보이지 않는 무쿠로입니다.
왜 이렇게 츤츤거리는 지... 쉽게 데레가 될 생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만 츤츤거려...
덧붙이자면, 리본은 정말 예리할거 같습니다.
네.
뒷부분은 대대적으로 수정했습니다.
묘하게 문체가 변한 것 같으면 수정한 부분입니다.
글 쓸 때마다 상태가 달라지면 문체도 변합니다.
들죽날죽인게 문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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