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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만 고양이 선원의 방/작은 서가

그늘이 드리운 혼마루[03]

by 깜냥이 2018. 2. 21.

"언제까지 가만히 있기만 할 건데!"

"쿠니토시... 미카즈키님도 생각이 있으신기라."

"그럼 설명을 해주던가! 아, 몰라! 그 인간, 내가 찾아내겠어!"

"잠깐... 기다리래이!"


계속 이어지는 무거운 분위기를 버티지 못한 아이젠이 기어코 소리를 질렀다. 어젯밤, 아츠시가 벽보를 가져온 이후 아와타구치 측의 분위기는 더욱 살벌해져있고 미카즈키는 굳게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다. 그를 아카시가 만류했지만 화를 주체 못해 다시 한 번 소리를 지르고 회랑을 뛰쳐나가 아카시가 그 뒤를 쫒아나갔다. 그 장면을 바라보던 미카즈키는 그저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내저었을 뿐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야만바기리가 정원에서 발견했다고 말했던 탓인지 곧장 밖을 향해 내달리는 아이젠을 쫒으며 아카시는 제발 귀찮은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빌었다. 설마 야만바기리와 마주쳤는데 또 정원에 나와 있을 리가 없지 않겠느냐며 외쳐봤지만 아이젠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엇!"

"쿠니토시!"


하마터면 뒤로 넘어질 뻔한 아이젠을 흰 팔이 붙들었다. 분명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던 데다 몸을 숨길만한 것이라고는 없는 정원 한복판, 갑자기 나타난 낯선 존재에 아카시가 곧장 살기를 끌어올리며 검에 손을 올렸지만 아이젠을 바로 세우고 걱정스러운 표정을 띄운 얼굴을 보고 손을 멈추었다.
아이젠과 눈높이를 맞추고 상처를 보며 인상을 쓰더니 이리저리 다른 상처가 더 있나 살피기까지 하는 모습에 아이젠도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곧 아카시의 곁으로 피했다.
그에 당황한 듯 미세하게 눈을 크게 뜬 사니와가 곧 언제 표정을 띄웠냐는 듯이 무심한 얼굴로 바로 서서 아카시를 바라보았다.


"그 짝이 무슨 속셈인지는 모르것지만."

"속셈은 하나 뿐이야, 당신들이 수리를 받는 것."

"인간의 도움 따위 필요 없심더."

"아무리 검이라 하더라도 그 몸은 인간의 몸 아닌가? 상처를 오래 방치하면 좋지 않아. 검의 녹을 오래 방치하면 좋지 않은 것처럼."

"필요 없다 안합니꺼. 솔직히 말하믄 검을 들 힘조차 없는 기라. 그 덕에 목이 붙어 있는 기 다행이라 생각하고 그만 돌아가는 게 어떻심꺼."

"나도 솔직히 말하자면 외형뿐이지만 어린 아이가 다친 꼴을 보고 그냥 돌아가기에는 양심에 가책이 느껴져서."


살기를 끌어올리는 아이젠을 제 뒤로 물린 아카시가 사니와와 같이 무심한 표정을 지으며 귀찮다는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먼저 말을 꺼냈다. 하지만 사니와는 표정과는 달리 단호하고 명료하게 제 할 말을 꿋꿋하게 해낼 뿐, 순순히 돌아갈 생각은 일절 없어 보였다. 설득하기엔 귀찮고 계속 사니와와 대치했다가는 아이젠이 달려들어 더욱 귀찮아질까 하는 염려에 되는대로 지껄였더니 상대 또한 되는 대로 지껄여온다. 뭐 이런 녀석이 다 있나싶은 표정을 지은 아카시는 결국 말이 통하지 않는다며 아이젠을 챙겨 다른 남사들이 모여 있을 회랑으로 돌아섰다. 그런 그들을 붙잡지 않는 사니와가 의아하면서도 그에게서 느껴지는 미묘한 기운에 혼란스러워하는 아카시를 보던 아이젠이 꾸욱, 아카시의 손을 당기듯 힘주어 잡았다.


"... 이상한 인간이야."

"그러게. 정말로 이상한 인간이구마."


걸음은 멈추지 않은 채, 두 형제는 빠르지도 늦지도 않은 속도로 사니와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몰골이야 어찌되었던 츠쿠모가미라는 것 인지, 베일 듯이 날카로운 살기가 피부로 느껴졌다. 곳곳이 상처투성이인 어린 아이, 그리고 아이를 보호하듯 뒤로 물리던 역시나 상처투성이의 청년. 처음엔 그저 떠넘겨져서 맡은 일이라며 가벼이 생각했던 일이 점점 무거워진다. 누군가를 이끈 적도 없을 뿐 더러 누군가를 보듬어 본 적도 없는, 존재감이 얇은 덕에 홀로 있는 일이 대부분이었던 내가 과연 잘 해낼 수 있을까? 숨이 막힐 듯이 짓눌러오는 중압감에 자리에서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아키타 토시로, 사요 사몬지, 야겐 토시로, 아츠시 토시로, 야만바기리 쿠니히로, 아이젠 쿠니토시, 아카시 쿠니유키. 얼마나 더 많은 이들이 이 곳에 있을까. 얼마나 더 많은 상처 입은 이들이 이 곳에 있을까. 고작 나 따위가 그들을 구할 수 있을까.


"아아.... 아카시."


아카시 세이쥬로, 그 작지만 당당했던 어께가 짊어지고 있었을 짐이 이제는 얼마나 무거웠을지 이해가 된다. 너는 도대체 어떻게 이 중압감을 버텨냈던 걸까. 어떻게 이런 짐을 지고도 그토록 굳건하게 서 있을 수 있었을까. 무관의 오장이었던 녀석들을, 그리고 기적의 세대를 이끌었던 너는 어떻게 그토록 강할 수 있었을까.

어느새 서늘해진 기온에 그제야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벗어났다. 건물의 안쪽으로 들어오고 나서부터 발소리를 죽여 조심조심 거처로 향하고 있는데 저 앞에서 두리번거리고 있는 아키타와 사요가 보였다. 나를 찾으러 다니는 건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지켜보니 부엌 쪽으로 다가가 안쪽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배가 고픈 건가? 그러고 보니 물건들 중에 어린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간식거리가 몇 있었다. 천천히 그 뒤로 다가갈 동안 두 아이 서로 뭔가 이야기를 나눌 뿐 위치를 이동할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다.


"없는 것 같지?"

"인기척은 없으니까."

"뭘 찾아?"


나를 찾는 것 같은 두 아이의 대화에 불쑥 끼어드니 소스라치게 놀라 뒷걸음질 치다가 부엌 안쪽으로 나동그라졌다. 그에 나도 덩달아 놀라 두 아이를 일으켜 다친 곳은 없는지 살피려했지만 굳이 살필 필요 없이 시선이 닿는 곳곳이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방금 전 봤던 아이젠, 스치듯 봤는데도 불구하고 상처투성이였던 야겐과 아츠시와 지금 눈앞의 아이들. 왜 이런 작은 아이들이 이런 몰골이어야 하는 걸까. 물론 외형만 어린 아이일 뿐 실제로는 그저 검의 츠쿠모가미임을 알고 있음에도 눈에 보이는 것이 더 와 닿는다.
조심스러운 손길로 아이들의 옷을 털어주고 혹시 수리 받지 않겠느냐 물어보니 화들짝 놀라 격하게 고개를 내젓는다. 그래, 쉽게 경계를 풀지는 않겠지. 수리는 천천히 설득하기로 하고 간식거리를 챙겨 아이들의 앞에 내미니 받을 생각을 않고 우물쭈물 서로의 눈치만 살핀다.


"어차피 나는 단 것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 너희가 가져가도 괜찮아."

"그..."

"음..."

"... 먹지 않아도 상관없으니 가져가. 내가 가지고 있어봐야 버리게 될 뿐일 테니."


계속 경계를 하면서도 탐이 나는지 힐끗대는 아이들의 모습에 무심히 옆에 놓인 탁자에 간식을 올려 두자 시선이 그대로 따라간다. 전임이라는 자식이 도대체 무슨 짓을 했으면 애들이 주는 음식까지 마다하는 것일까. 어떤 쓰레기 자식인지 면상이 심히 궁금하다만 죽었다고 했으니 볼만한 꼴은 아니리라. 아이들을 뒤로하고 무언가 더 쥐어 줄 것을 찾아 방으로 들어오니 부엌 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뒤 이어 아이들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사이에 그걸 챙겨서 도망가 버리다니, 경계는 해야겠고 그걸 먹고는 싶었던 모양이지. 그걸 가져간다 해도 과연 먹을까 싶기는 하다만 부디 잘 나누어 먹었다면 좋겠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담당자와 통화를 하지 않았는데 해야 하나? 전화 해봐야 내가 일방적으로 성질을 내고 그 쪽은 울면서 힘내라고 하는 웃기는 꼬락서니일 뿐인지라 단말기를 멀리 밀어두었다.




외출을 했던 아키타와 사요가 먹을 것을 가져왔다. 제법 큰 크기의 센베 봉투를 작은 손으로 들어 올리며 자랑을 한다. 그 사니와에게 받았다면서 말이다.
그렇다. 사니와에게 받았단다. 그 말에 미카즈키가 한숨을 내쉬었고 야겐과 아츠시가 격분하여 버리려던 것을 음식을 버리면 벌 받는다는 아오에의 만류로 진정했다. 일단 무슨 수작을 부린 것 같지는 않고,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주전부리니 그저 나누어먹자며 웃는 이시키리마루의 말에 풀이 죽어있던 아키타와 사요가 기운을 차렸다. 둘이 신이 나서 센베 봉투를 뜯어내더니 다른 남사들에게 하나하나 나누어 주는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야겐은 조용히 회랑을 빠져나왔다. 먹을 것을 받아온 형제, 그리고 그것에 별다른 반발 없이 받아먹는 몇몇 남사들. 도대체 미카즈키는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어 한참을 방황하다 욱하는 심정으로 사니와를 찾으러 부엌으로 향했다.

하지만 야만바기리의 증언이나, 직접 겪었던 것과 같이 사니와는 그 존재를 알아차리기가 제법 버거웠다. 부엌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인간을 발견하지 못했으며 그의 거처로 생각되어지는 방은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미안하지만, 안에 사람이 있거든. 그렇게 쳐다보면 부담스러운데."

"우왓!"

"놀라게 한 거라면 미안."


비어 보이는 방 안을 그저 노려보던 야겐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청년의 모습에 놀라 뒷걸음질 쳤다. 은빛 머리카락의 청년은 미안한 기색이 조금 느껴지는 얼굴을 하며 방 밖으로 나와 야겐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야겐은 그 손을 쳐내고 일어나 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언제 따라온 건지 아츠시가 나타나 야겐의 옆에 서서 사니와에게 검을 들이밀었다. 사니와는 그런 둘의 모습에 그저 철없는 어린애를 본 듯이 한숨을 내 쉬었고 그에 아츠시가 격분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돌아가라고 분명 말 했을 텐데!"

"몇 번을 말하는지 모르겠지만..."

"필요 없어! 필요 없다고! 인간의 도움 따위!"


사니와의 말을 도중에 끊어내며 진절머리 난다는 듯이 아츠시가 소리를 질렀다. 그는 머리로는 분명 이런 무방비 상태의 인간 따위 베어버리면 그만이라 생각하면서도 문득 상처투성이였던 누군가가 떠올라 차마 손을 움직이지 못했다. 타락에 물들어가던 그와, 그를 베어내고 울던 누군가를 떠올리자 검 끝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둘의 머뭇거리는 검을 본 사니와가 표정을 굳히고 다가가자 누군가를 떠올리며 머뭇거리던 둘은 재빨리 양쪽으로 나뉘어 도망쳐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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