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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만 고양이 선원의 방/작은 서가

그늘이 드리운 혼마루[02]

by 깜냥이 2018. 2. 21.

이른 아침, 무언가 쓰인 종잇장을 보고 있던 미카즈키가 곧 그것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읽는 내내 인상을 쓰고 있던 그였기에 내용이 궁금해진 단도들이 기웃거렸지만 종이를 집어든 이시키리마루에 의해 제대로 살피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기분이 나빠 보이는 미카즈키에 반해 이시키리마루는 그저 당황한 듯 종이와 미카즈키를 번갈아 보다 허탈하게 웃었다.

.
"꽤나 당돌하지 않은가."

"자신은 이곳에 새로 부임하게 된 사니와 세츠인이며 너희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면 도움을 주고 싶다. 나도 강제로 이곳에 와 있으니 거절해도 소용없다. 자신을 거절하고 싶다면 시간 정부 측에 요청을 하던가 해라. 요약하자면 이 정도네."


이시키리마루에게서 종이를 이어받은 아오에가 궁금해 하는 단도들을 위해 종이의 내용을 요약해 일러주었다. 원문은 그가 읽은 것과는 달리 제법 장문으로 정중하게 적혀 있었으나 글의 요지는 제법 당돌했다. 더욱 간단히 말하자면 자신도 오고 싶어 온 것도 아니고 이쪽에서도 달가운 객은 아니니 싫다면 보낸 이에게 따지라는 소리다. 

웅성이는 남사들 가운데 흉흉한 기색을 내보이며 종이를 불태워버리고 싶다는 듯이 바라보던 야겐과 아츠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들을 아무 말 없이 그저 바라만 보고 있던 미카즈키가 곧 못 말리겠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다녀오게. 내가 만류한다 한들 그대들이 듣겠는가."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이 무에 있겠는가. 그대들의 마음이야 익히 잘 알고있네. 허나 또 다시 마주치지 않도록 주의하게."


미카즈키의 허락에 둘은 허리를 깊게 숙이고 곧장 회랑을 빠져나가 종이를 가져왔던 그 자리로 향했다.



 
[돌아가]


기껏 밤새 머리를 쥐어짜가며 장문의 편지를 쓴 보람 없이 답장은 고작 두 글자(일본어 표기 시 '帰れ')뿐이었다. 그것도 편지를 붙여두었던 그 벽에 대문짝만하게 써놓다니.
그렇다. 써놓았다. 써 붙여놓은 것이 아니라 써놓았다. 이 망할 꼬맹이가 바닥을 부수는 것도 모자라 벽에 낙서까지 해놓다니... 지가 치울 것도 아니면서! 벽에! 낙서를! 아니 높은 곳은 어떻게 쓴 거야? 이놈의 꼬맹이들 둘이 같이했지!


"망할 꼬맹이들..."


그래도 어쩌나. 그들을 만나도 혼낼 방법도 없고 그 전에 만났을 때 검을 휘두르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그래도 내가 걸레를 가져와서 닦아내느라 끙끙대거나 할 필요는 없어 다행이지만 이걸 발견하고 순간 대략 멍해지더라. 하필이면 먹물로 써놓다니, 망할 꼬맹이들. 벽에 손을 올려 글씨를 지워버리고 새로 편지를 적어서 보낼 요량으로 방으로 돌아와 펜을 들었다. 기껏 정성들여 쓴 편지에 두 글자 답장을 받고나니 길게 쓸 기분이 들지 않아 이번엔 간단명료하게 용건만 적어서 같은 장소에 붙여두었다. 부디 이번엔 대화를 해 볼 수 있길 바라고 있지만 사실 또 거절당할 가능성이 높겠지.

복잡한 머리를 식힐 겸 정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틈틈이 둘러보며 느낀 거지만 이 혼마루는 넓기도 제법 넓었다. 거기다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도 있었으니 여길 다 둘러보려면 꼬박 하루는 걸리지 않을까. 하지만 계단 쪽으로 다가가 갈수록 숨이 막힐 정도로 갑갑해지는 공기 탓에 가까이 가는 것도 꺼려져 올라갈 엄두도 내지 못하고 그 주변조차 얼씬거리지 않았으니 성의 중심부에 무엇이 있는지 조차 알지 못하는 형국인 것이다. 그럼에도 굳이 안쪽으로 들어서고 싶은 기분은 아니기에 정원으로 나왔으나 삭막하기 그지없는 모습을 보니 그냥 거처로 돌아갈 걸 그랬나 싶기도 하다.


"어..?"


그저 대강 훑듯이 둘러보다 무언가 흰 천 같은 것이 날리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언뜻 푸른 눈동자와 눈이 마주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다시 그 곳을 바라보니 너저분한 거적을 뒤집어 쓴 청년이 도망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지금 저 녀석, 나랑 눈이 마주치고 도망치는 거야? 지금까지 만난 남사가 저 녀석까지 포함해 고작 5명에 불과하지만 나를 알아챈 녀석은 저 녀석이 유일하다. 우연이겠지 싶지만 아주 잠깐 스치듯이 눈이 마주쳤을 뿐인데 나를 인식했다는 것이 당황스럽기 그지없다. 지금까지 유유자적 멋대로 돌아다닌 것은 정부에 있었을 때도 남사들이 날 알아차리지 못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안전하리라 안심하고 있었건만!


"젠장, 몸을 사려야하나."


그러긴 귀찮은데. 키가 작은 것도 아니고 일본인 치고는 제법 큰 키다. 어딘가에 숨는다고 숨겨지는 체격이 아니니 알아채는 이가 있다면 골치가 아파진다. 공격을 할 생각이 없는 이라면 괜찮겠지만 그 두 망할 꼬맹이들의 답장으로 추측하건데 이곳의 존재들은 내게 호의는 커녕 적의만 가득한 모양이니 제법 신변에 위협이 된 달까. 끽해봐야 죽기밖에 더 하겠냐는 생각으로 오긴 했지만. 젠장, 진짜로 목숨이 위험해. 그 차고 넘친다는 내 영력이라는 놈은 도대체 어떻게 쓰는 건데?

결국 골치 아픈 사실만 깨달은 채로 거처에 돌아왔지만 해결 방안이 전혀 없기에 방 안을 서성거렸다. 정보가 부족한데 얻을 방안도 없으며 신변이 위험한테 지칠 방도도 없다. 하지만 처음에 온 아키타와 사요, 오늘 도망친 청년-아마도 야만바기리 쿠니히로일 것이다-을 보아하니 적의가 없거나 상대적으로 적은 이가 있는 모양이니 조금 안심 할 수 있지 않을까. 글쎄. 낙천적으로 생각해보려 해도 워낙 성정이 현실을 직시하는 편인지라 그러지 못하겠다. 이 상황에서 아카시라면 어땠을까. 하는 시답잖은 생각도 해 보았지만 역시 나는 나다. 일단 이 영력이라는 녀석이 내 의지로 움직이는 모양이니 방어는 어느 정도 가능하겠지.

한참을 고민하다 대답이 왔는지 확인하러 나온 내가 본 것은 전과 마찬가지인 단 두 글자였다. 몸을 사리긴 개뿔 이라 속으로 외치며 직접 내 이야기를 들어줄 남사를 찾으러 나섰다.




고작 인간 한 명이건만 발견하지 못 한 것이 억울한 듯 야겐과 아츠시는 미카즈키의 반대에도 외출을 감행했다. 그들의 외출이 길어지자 다른 남사들도 하나 둘씩 외부에 나가기 시작했고 야만바기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현재 자신들이 모여 있는 곳은 타락한 영력 탓에 오래 있기 힘들다보니 줄 곧 정원에 나오곤 했었다. 사실 저들이 있는 공간이 가장 심했을 뿐 다른 곳도 마찬가지이기는 하다. 

말라비틀어진 나무들과 흉물스러운 구덩이가 있는 부근을 시선으로 훑던 야만바기리가 흠칫 놀라 몸을 경직시킨다. 분명 무언가가 보였다. 무언가와 스치듯 아주 잠깐 마주친 것을 느낀 그가 서둘러 그 자리를 피했다. 무언가 보긴 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음에 당황스러워 일단 도망쳤으나 곧 자신이 본 것이 인간의 아이임을 깨닫고는 걸음을 멈추었다.
하지만 그와 눈이 마주치기 전까지도 존재를 인식하지 못했음에 더욱 당황스러워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저 제자리에서 혼란스러운 머리를 감싸쥐었다. 마침 근방에 있던 야겐이 다가와 그를 툭툭 건드리며 그의 정신을 깨웠다.


"야만바기리. 이곳에서 무얼 하고 있어?"

"... 인간을 봤다. 그런데..."

"봤다고? 어디에서?"

"일단 모두에게 이야기하는 것부터다. 뭔가, 이상해."


말을 아끼는 야만바기리의 모습에 야겐이 재촉을 했지만 자신의 혼란스러움을 정리하지 못한 그는 다른 이들의 의중을 묻는 것이 우선이라 결정을 내렸다. 사본일 뿐인 자신이 모르더라도 연식이 오래된 이름 높은 명도들은 뭔가 알 고 있는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
서둘러 모두가 모인 회랑에 들어서니 안쪽 문 앞에 앉아있던 미카즈키가 감은 눈을 뜨고  둘을 확인하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것을 본 야만바기리가 어떻게 이야기를 꺼낼까 안절부절 하다가 한편에 자리를 잡고 앉아 미카즈키가 눈을 뜨길 기다렸다. 그리고 조금 뒤 눈을 뜬 미카즈키가 회랑을 훑어보며 자리를 비운 이와 돌아온 이를 확인 했다.


"그래, 야만바기리와 야겐이 돌아왔구나."

"조금 이상한 일이 있어서."

"이상한 일이라..."
 
"정원에서 인간을 만났다. 그런데, 내가 본 것은 그저 은빛 눈동자뿐이야. 눈이 마주치고 나서야 그 자의 존재를 알아챌 수 있었다. 인간이 이렇게까지 은신하는 것이 가능한 건가?"

"그건... 참으로 이상하구나. 허나 인간이 아닌 존재의 기척은 없으니 분명히 인간이 맞을 터인데."


미카즈키의 말에 야만바기리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미카즈키는 생각에 빠진 듯 더 이상 말이 없었고 그것은 다른 남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무거운 침묵만 감돌던 회랑은 외부로 나갔던 남사들이 하나 둘 돌아옴으로 조금씩 말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나마도 험악한 표정으로 들어온 아츠시에 의해 도로 사그라지고 말았다.
아츠시는 손에 들린 종이를 미카즈키에게 내밀었고 미카즈키는 한숨을 내쉬며 그를 받아들었다. 여전히 정중한 문장이지만 이전과 다른 것은 이런저런 수식을 붙여 장황한 문장이 아닌 용건만을 적어낸 간단하고도 짧은 문장이라는 것이다.


"수리실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모양이로군."

"그래서 수리를 해준다 하던가요?"

"그렇다네만, 직접 대화를 하고 싶다는 모양이야."


누구든 읽고 싶은 이가 읽으라는 듯이 던지듯 내려놓은 종이를 아오에가 집어 들며 물으니 미카즈키가 코웃음 치며 대답해주었다. 아와타구치들이 모여 있는 곳이 잠시 소란스러운 듯하다 싶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그리고 그 사이 글을 다 읽은 아오에가 자신이 대화를 해보겠다며 나섰다. 그런 그의 부상이 심하다는 이유로 야만바기리가 만류하며 자신이 하겠다고 했지만 그도 별반 다르지 않은데다가 혹시 모를 위험이 있다며 미카즈키가 반대했다. 돌려보내려 강압적인 태세를 취하지도 않고 교류를 수락하지도 않는 모습에 모두 의아해 했지만 미카즈키는 그저 부상자들이 모인 방을 바라볼 뿐 아무런 언질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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