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까만 고양이 선원의 방/작은 서가

그늘이 드리운 혼마루[04]

by 깜냥이 2018. 2. 21.

검의 끝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무엇이 그토록 두렵기에 전장에 익숙할 검들이 내가 알아챌 정도로 떠는 걸까. 돌아가라 한다고 모두 내팽개치고 돌아갈 수 있었다면 내가 지금 이러고 있지도 않을 테지. 
한 쪽에 밀어두었던 단말을 꺼내 신경질적으로 담당자에게 연결하니 저쪽은 또 무슨 일이 있는 건지 목소리가 가라앉아있다.


[세츠인님.. 그 쪽 상황은 좀 어떠십니까?]

"사흘째 만나는 남사들마다 돌아가, 돌아가. 짜증날 지경이야. 좀 제대로 된 대화라는 걸 하고 싶은데."

[곤란하신 와중에 안 좋은 소식을 알려드려야함에 죄송스럽기 그지없습니다만... 확인한 바로는 혼마루 중심부에 좋지 못한 기운이 뭉쳐있다 합니다. 그 기운에 남사들이 타락해 버린다면 사태가 더 심각해질 수 있습니다.]

"하..."


흉악한 난이도의 퀘스트를 강제로 쥐어줘 놓고는 이제는 제한 시간도 있단다. 그런데 그 제한시간도 정확히 언제까지라고 단정 짓기도 힘들다하니 무조건 최대한 빨리 해결하는 수밖에 없다. 있는 대로 한숨을 쉬며 애꿎은 머리카락만 헝클어대고 있으니 단말의 너머로 사과의 말이 들려왔다. 당신이 죄송해서 어쩔 거야. 그런다고 사태가 나아지는 것도 아니고. 퉁명스럽게 내뱉은 말에 상대는 할 말을 잃었는지 아무런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도움이 될 만한 물건을 보내준다는 그의 말로 통화를 마치고 바닥에 드러누웠다. 

사태가 더 심각해 질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더 심각해진다니 도대체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건데. 내가 도대체 뭘 할 수 있는데. 다들 나보고 꺼지라는데 이래서야 무슨 방도가 있다 하더라도 시도도 못 할 거 같다고!
욱하는 기분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방 안을 한참 서성이다 곧 겉옷을 챙겨들고 정원으로 뛰쳐나갔다. 하지만 여전히 황폐하고 실내보다 더 갑갑한 공기에 기분이 나아지기는커녕 더 막막해졌다.




사니와에 대해 이것저것 떠들어대는 남사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눈을 감고있던 미카즈키가 문이 열리자 살짝 눈을 떠 그가 누구인지 확인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야겐과 아츠시는 그런 회랑의 모습에 잠시 인상을 썼다가 형제들에 섞여 들어갔다.
둘이 돌아오자 더 높아진 아와타구치들의 분노 어린 목소리에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이 보였다. 하지만 아키타와 사요는 서로 시선을 마주하더니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좋은 사람 같았는걸."

"고작 먹을 것에 넘어가기라도 한 거야? 우린 인간이라면 싫어!"

"아니..."

"미다레, 사요는 제 생각을 말 했을 뿐이야. 그리 성을 내지 않아도 괜찮다고?"


조그마한 목소리로 읊조린 사요의 말에 미다레가 격분하며 소리를 높였고 그것을 아오에가 조근조근 타일러 진정시켰다. 하지만 그도 아와타구치들이 왜 저렇게까지 적대적인지 이유를 모르는 것이 아니니 그저 쓰게 웃을 뿐 이었다. 안쪽 방의 문을 바라보던 아카시와 아이젠은 사요의 말에 잠시 마주보며 생각을 하는 듯 하더니, 이상한 인간이란 평을 남기고 다시 문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러고 보니 저들도 사니와를 만났던 이들 중 하나였음 을 떠올리며 아오에는 그 평가를 되새겼다. 착한데 이상한이라, 자신도 그를 만나고 싶지만 모두들 자신의 외출은 절대로 반대할 테지. 그런 아오에의 생각을 알아챈 것일까 자신을 지긋이 바라보는 이시키리마루에게 아오에는 웃으며 어께를 으쓱해 보일 뿐 이었다.
그런 아오에의 반응에 못 말리겠다는 듯이 고개를 내젓던 이시키리마루가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어 놀란 얼굴로 회랑 안을 두리번거렸다. 그에 덩달아 놀란 아오에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무슨 일이냐 묻자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는 것을 멈추고 당황한 듯 안절부절 못했다. 


"이시키리마루?"

"신당, 신당에 가봐야겠어."

"아니, 그 몸으로 어딜 가시려는 겁니까?"

"그대가 가면 이 안에 있는 이들은 어쩌나. 야만바기리, 그대가 대신 가 주게."

"내가?"

"찰나였지만 사니와를 발견 할 수 있었으니, 이번에도 그러지 않겠나. 그대가 적임자야."


안절부절 못하는 이시키리마루의 모습에 의아한 아오에가 그를 부르자 흠칫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갑자기 사당에 가야한다니, 제 형체가 어떠했는지 추측할 수도 없을 정도로 망가진 신당에 가서 도대체 무엇을 한단 말인가. 아오에의 만류에도 그가 버티고 서있자 결국 그를 말린 것은 미카즈키였다. 야만바기리는 갑작스레 제가 호명되어 놀란 얼굴을 했지만 미카즈키의 설명에 곧 수긍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회랑에서 정원까지의 거리가 그리 멀지는 않지만 점차 시야에 정원이 들어오기 시작하자 위화감이 들었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아니 오늘 낮까지만 해도 황폐한 정원이었다. 하지만 훌륭하기 그지없는 정원과 언제 부서져 있었냐는 듯이 말끔한 신당에 야만바기리는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갑갑하게 느껴지던 사기는커녕 맑고 청명한 기운이 가득한 정원을 얼떨떨해하며 둘러보던 그는 사니와를 찾기 위해 일단 걸음을 재촉했다. 

신당 주변부터 돌아다니기 시작한 야만바기리가 사니와를 찾아낸 곳은 얼마 떨어지지 않은 연못에서였다. 물에 비친 달을 구경하고 있는 것인지 가만히 서서 연못을 들여다보고 있는 은발의 청년은 사니와임에 틀림없었다. 희미하다 못해 알아채지도 못하던 그가 맞는 것인지 의심이 들 정도로 제 기운을 드러내고 있는 사니와에 의아한 야만바기리가 가까이 다가가자, 그 기척을 느낀 사니와가 그를 돌아보았다. 놀란 야만바기리가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나자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있던 사니와가 푸스스 웃으며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여기 있던 구덩이, 본래 연못이었던 모양이네. 처음 본 그 모습으로는 상상도 못했는데, 제법 근사한 정원이 이야."

"당신이 정화시킨건가......?"

"정화인가? 공기라던가 정원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어떻게든 하고 싶다고 생각한 것이지만."
 
"생각.." 

"아, 그러고 보니. 네가 도공 쿠니히로 제일의 걸작이라지? 날 발견하다니 대단한데? 정부에서도 여기서도 다들 날 보지 못했는데."


야만바기리의 말에 순순히 대답을 해주는 사니와는 무심한 표정인데도 왠지 기분이 좋아보였다. 갑작스런 제 칭찬에 당황한 야만바기리가 우왕좌왕하며 제자리에 서서 어쩔 줄 몰라 하자 사니와가 소리죽여 웃더니 불쑥 가까이 다가갔다. 사니와의 돌발행동에 놀란 야만바기리가 검에 손을 올렸지만 눈앞에 보이는 먹색의 눈동자에 헛손질을 하고 말았다. 


"역시. 걸작인 이름에 걸맞은 예쁜 얼굴이구나. 사진으로는 얼굴을 보기 힘들어 궁금했는데."


가까이 다가온 눈이 곱게 휘며 웃음을 짓는다. 무심한 목소리가 저를 예쁘다하니 그것이 진심인 듯 느껴져 얼굴이 붉어진 야만바기리가 기어코 예쁘다 하지 말라며 소리쳤다. 그에 놀란 사니와를 뒤로하고 처음 그를 만났을 때와 같이 야만바기리는 전속력으로 도망치고야 말았다. 




시야가 핑글 돌았다. 갑자기 중력이 강해진 것처럼 온몸이 무거워짐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간신히 바로 서있을 수 있게 되었을 때 천천히 눈을 뜨자 눈앞에 보인 것은 커다란 구덩이가 아닌 내 얼굴이 보이는 연못이었다. 놀라서 순간 참았던 숨을 내쉬고 주변을 둘러보니 황폐한 정원이 아닌 잘 조성된 정원이 보였다. 무언가 부서져있던 잔해는 번듯한 신당의 모습을 하고 있었고 말라비틀어진 나무는 푸릇한 잎을 피워냈다. 다시 시선을 돌려 연못을 바라보니 바닥이 보일 정도로 맑은 물이 달을 비추고 있었다.
그저 갑갑함에 정원만 이라도 숨을 돌릴 장소였으면 좋겠다고 바랐을 뿐이다. 그런데 순간 피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면서 급격히 체력이 떨어져 시야가 어지러워졌다. 그리고는 지금 눈에 보이는 대로, 도대체 영력이 사용되는 기준을 알 수가 없다. 작은 범위라면 적당히 통제가 된다고 생각했더니 갑자기 이런 엄청난 규모로 사용될 줄이야.
 
설마 저 뒤편까지 변한 건 아니겠지. 범위가 얼마나 되는지 주위를 살피려 고개를 돌린 순간 언제부터 보고 있었는지 야만바기리와 정통으로 눈을 마주쳤다. 놀란 얼굴로 또 도망치려는 듯이 뒷걸음질 치던 그는 두어 걸음 물러나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놀란 탓인지 적의가 느껴지지 않는데다가 공격할 의사는 전혀 없어 보여 말을 걸어보니 순순히 대답이 들려온다.


"아, 그러고 보니. 네가 도공 쿠니히로 제일의 걸작이라지? 날 발견하다니 대단한데? 정부에서도 여기서도 다들 날 보지 못했는데."


눈이 마주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는 나를 확실히 알아채 줄 수 있는 존재임에 분명했다. 이 와중에 또 아카시를 떠올리며 그에게 다가가자 놀라 검에 손을 올리는 것이 보였다. 그에게서 공격할 의사는 느껴지지 않았고, 적의도 느껴지지 않았으니 괜찮지 않을까 하고 무작정 들이밀자 지저분한 천 밑으로 당황해서 흔들리는 녹색의 눈이 보였다. 금발에 녹색 눈이라니 제법 찬란한 외모다. 그저 웃으며 예쁘다 칭찬을 해주니 얼굴이 곧 터질 것처럼 붉어지더니 예쁘다 하지 말라며 냅다 도망쳐 버렸다.


"칭찬도 못하냐."


야만바기리 나가요시의 복제품, 그렇지만 쿠니히로의 최고 걸작. 복제품인 것이 콤플렉스라 들었기에 일단 칭찬부터 해 본 것인데 제법 반응이 격렬하다. 하긴 츠쿠모가미라 하더라도 외형은 남성인데 예쁘다는 칭찬은 적절하지 못 했으려나? 잠시 고민을 하며 발걸음을 옮기려하니 순간 앞으로 고꾸라질 뻔 했다. 아직도 머리가 어질어질하니 일단 돌아가서 휴식을 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