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부터 편수가 늘어나려다 말고, 쪽수가 무식하게 늘어났습니다.
아니, 계속 쓰는데 이상하게 끝이 안나서…
꽤 오글거리는 닭살 커플입니다.
문제점이 많았고, 그걸 캐치하지 못해서 쪽박난 거죠.
무쿠로는 수로 외각에 앉아서 기다렸다. 이날 그는 10월이라 무거운 외투 때문에 사투를 벌이며 잠영을 했었다. 반쯤 의식불명상태의 지오토를 끌고, 죽을힘으로 헤엄쳤었다. 정말 힘들었었다. 지금 돌아보면 다 추억이라는 게 어쩐지 무섭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며 기다리고 있자니, 까만 가죽 장갑을 낀 손이 하나 올라온다. 그건 턱 하니 외각의 턱을 잡았다. 그리고 잠시 시간을 두고 두 그림자가 솟아올랐다. 이때 힘이 부족해서 죽기 살기로 환술을 사용해야 했었다. 속이 울렁거리고 죽을 것 같았지만,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멀쩡한 척 서 있었다. 쓸데없는 오기가 따로 없었습니다. 고소를 그리며 중얼거린다.
그에 반해 지오토는 주저앉아서 멍하니 손을 들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물이 뚝뚝 떨어지는 상태다. 그걸 흘깃 본 스페이드가 냉소적인 어조로 중얼거렸다. 저거 나름 걱정이었습니다. 무쿠로가 변명처럼 주석을 달았다.
「이런 경험은 또 처음입니다.」
「…… 웩, 물 먹었어…….」
「하아? 정말 잘하는 짓입니다, 지오토.」
맥 빠진 어투로 그가 말한다. 지오토는 굉장히 미묘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굉장히 복잡한 심경이 뒤범벅된 표정이라 지켜보던 무쿠로가 놀랄 정도였다. 감정표현이 극히 드문 지오토였기에, 마지막 순간에만 보이던 모습이었다. 무심코 그 순간을 떠올린 무쿠로의 표정이 살짝 굳는다.
[지금 이름으로 부른 건가? 언제나 너, 아니면 보스였는데?]
순간적으로 조금 창백하던 지오토의 얼굴에 혈색이 돌았다. 기묘한 술렁임이 인다. 쿵쿵거리는 심장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이름이란 신기한 거네요. 무쿠로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다가 [술기운이 오른 건가?]라는 지오토의 생각에 넘어질 뻔했다. 둔한 건 알고 있었지만, 그거 진심으로 생각한 겁니까?! 무쿠로는 정말 그렇게 묻고 싶었다. 갑작스러운 두통이 급습했다. 날 놀리는 겁니까? 어쩐지 그렇게 따지고도 싶어졌다. 어째 또 낚인 기분이라 한숨도 같이 흐른다.
「내 이름, 기억하고 있었나?」
「G가 그렇게 불러대는데 모르리라 생각했습니까?」
그가 멀뚱히 돌아보며 도리어 묻는다. 잠시 G의 행적을 돌이켜보면 지오토가 이해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모르면 이상할 정도로 꼬박꼬박 지오토의 이름을 부르던 G다. 하지만, 그는 만나기 전부터 지오토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 잊지 않고 기억해준 게 아니라는 건가?]
“저 성질에 그런 말을 할 것 같습니까?”
무쿠로가 회의적인 표정으로 토를 단다. 정말 많은 것을 바라고 있군요. 저 자존심과 성질머리에 그걸 인정할 리 있겠습니까? 무쿠로는 아주 냉정하게 자신을 평가했다. 그리고 그건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지오토는 그런 그를 슬쩍 노려보다가 어쩐지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명령했다.
「이런 상태로는 본부에 돌아갈 수 없다. 그러니 스피~네에 오늘 신세 좀 지고 돌아가겠다.」
「내 의견과는 상관없이 확정입니까?」
「물론. 명령을 거부할 생각인가?」
스페이드는 잠시 그런 그를 바라보다가 한숨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이길 수 없다,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었다. 너라는 사람은……! 같은 체념이 뒤따랐다. 이길 수 없는 상대에게 개개봤자 추해지기만 할 뿐이죠. 그래서 나는 너의 명령에 따랐다. 무쿠로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그건 사실 지금도 마찬가지인데…….
「…… 하아, 어쩔 수 없군요. 알았습니다. 따라오도록 하세요.」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앞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오토는 그대로 앉아서 멀뚱히 그의 뒷모습만 지켜봤다. 꽤 거리가 떨어지고 나서야 뒤따르는 기척이 없음을 알아차린 그가 급히 돌아온다. 그리고 꼼짝도 없이 앉아있는 지오토를 발견하고는 어이없음을 숨기지 않았다.
「뭐 하는 겁니까?」
「못 일어나겠어.」
「…… 장난합니까?」
「진짜 술기운 때문에 못 움직이겠다고. 장난 같은 거 아니다.」
스페이드는 기어코 해탈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린다. 뭐든 예상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이건 상상 이상이었습니다. 덩달아 무쿠로도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뻔뻔하다는 생각도 했지만, 그보다 이런 사람에게 약해진 자신이 신기했었다. 그런 감정에 거부감이 없다는 것까지도. 지금도 그래서 괜히 짜증이 일었다.
「정말 귀찮게 만드는 군요, 보스.」
「뭐, 정중하게 안내해라.」
「걷지도 못하면서 참 당당하기도 하십니다.」
그는 한숨을 쉬며 지오토에게 다가갔다. 그는 농담처럼 타박을 주었지만, 어쩐지 지오토의 표정이 어두워 보여서 괜히 찝찝했었다. 술에 많이 취한 것 같아서 자기 기준으로 저자세를 취하고 있건만,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도통 이해하지 못한 탓이다. 정작 지오토의 불만은 조금 다른 곳에 있었다. [다시 보스, 인가? 왜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 거지?]라는 아주 단순한 부분이었다. 조금 씁쓸하게 울리는 지오토의 생각에 무쿠로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저었다.
특별한 존재가 생긴다는 생소한 감각에 스페이드는 무의식적으로 지오토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이름을 부르지 않았었다. 눈치 빠른 그가 그런 신호를 모를 리 없다. 그저 인정할 수 없어서, 혹은 인정하기 무섭기에 멀어지려고 했을 뿐이다. 끝까지, 그는 자신이 지오토와 다른 세계에 존재한다고 생각했으니까. 그게 어리석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난 지금도 너와 나 사이에 깨트릴 수 없는 벽의 존재를 느낍니다. 단 한걸음, 그 거리가 서로에게 이득인 겁니다. 무쿠로는 그렇게 머릿속으로만 생각했다.
「이러면 되겠습니까?」
스페이드는 지오토를 가뿐히 안아 들고 물었다. 소위 말하는 공주님 안기 자세다. 지오토의 표정이 다시 묘하게 변한다. 뭔가 아닌 것 같은데, 콕 찍어서 이야기하기 어려운 듯했다. 그답지 않게 한참을 주저하다가 결국 한마디 던진다.
「이건 어딘가 이상한데?」
「가장 정중하게, 난 이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가볍게 대답하며 스페이드는 걸음을 옮겼다. 가벼운 걸음이었지만, 상당히 지쳐 있었던 그는 자기 집까지의 거리를 계산하며 지오토의 불만에 대강대강 대답하고 있었다. 성의없는 대답이었지만, 여과 없이 흘러나오는 진담인지라 지오토는 조금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그래도 이런 모습은 조금 곤란한지, 한마디를 더 던진다.
「그냥 업어.」
「그러다가 토하면 곤란합니다.」
「그게 문제인 건가?」
「물론이죠. 이 상태에서 토하려 하면 던져버릴 수 있지 않습니까?」
「심술부리지 마. 그냥 업어.」
「기각합니다. 어차피 보는 눈도 없으니 상관없지 않습니까?」
「진짜 스피~는 심술밖에 없군.」
「뭘 새삼스레.」
지오토가 노골적으로 한숨을 내쉬자, 스페이드는 상큼하게 웃는 얼굴로 답했다. 가까워지길, 특별한 존재를 만드는 걸 무서워했으면서 이런 면에서는 무방비했었군요. 무쿠로가 기분 나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건 과거의 한심한 작태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지금의 자신을 지배하는 애매한 감정 탓이다. 애매하기는커녕 너무 확연해서 짜증 날 정도였지만, 의도적으로 계속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 날 설득하고 싶어서 이 꿈을 꾸는 거라면 탁월한 선택이었습니다, 사와다 츠나요시. 그는 진짜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애써 참았다. 명확하게 만드는 순간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흐를 것이다. 그런 것쯤은 알고 있다.
무쿠로가 그런 생각에 잠긴 사이, 티격태격하던 그들은 스페이드의 집에 도착했다. 상당히 낡지만 어쩐지 고풍스러워 보이는 건물이었다. 독립주택이 아니라 맨션이라는 점이 조금 뜻밖이었을 뿐, 굉장히 멀쩡한 건물이었다. 그것에 조금 놀랐던 지오토는 곧 4층 복도 끝 호실에 들려가서는 깜짝 놀랐다.
회색의 방안에는 1인용 침대 하나와 장롱 하나, 긴 침대 같은 소파가 하나, 그리고 섬세한 문양이 새겨진 나무 책상과 의자 하나가 전부였다. 색감도 회색과 조금 무거운 밤색, 밝은 갈색 일색이다. 너무 수수해서 도리어 이상해 보일 정도였다. 지오토는 그런 감상을 한마디로 표현했다.
「멀쩡하잖아?」
「너한테 내가 어떤 이미지인지 아주 잘 알 것 같습니다.」
스페이드의 핀잔에 지오토는 그냥 슬쩍 웃을 따름이다. [그런 복장이라서 좀 특이할 줄 알았는데…….]라는 생각이 따갑다. 덕분에 지금 아주 특이한 환경에서 살아가게 된 무쿠로는 잠시 폐허가 된 고쿠요 랜드를 떠올리고 그냥 묵념했다. 돈을 구해서 개축해야겠습니다. 무쿠로는 가능하다면 반드시 그렇게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사실 거긴 사람이 살만한 곳은 아니다.
「스피~.」
「뭡니까?」
「이 주위에 들어갈 수 없는 방이 있는 유령 맨션이 있다고 들었다. 알고 있나?」
「여기입니다. 누가 들어오는 게 싫어서 환각을 걸어놓았더니 어느 틈엔가 그렇게 불리더군요.」
지오토는 아주 잠시지만, 만악의 근원을 보는 눈으로 스페이드를 바라봤다. 이 도시에 떠도는 괴담 대부분이 그가 행한 진짜 일이라는 점에서 확실히 만악의 근원이다. 그는 지오토가 보내는 이걸 어쩌면 좋으냐는 듯한 눈길을 무시하고 한쪽 나무 의자에 앉혔다.
「별건 없지만, 구경이라도 하면서 있으십시오. 난 목욕할 물을 준비하겠습니다.」
「이것도 특별 서비스?」
「어떨까요?」
스페이드는 지친만큼 부드럽게 풀린 표정으로 웃었다. 술이 과하게 들어갔기 때문일까? 그는 이상할 정도로 자상했다. 지오토는 그렇게 느꼈고, 그걸 한마디로 줄여서 [신기하다]라고 생각했다. 상냥하기에 이상하다는 점이 그답다. 그리고 자신의 말을 지키는 점도 그다웠다. 피곤함에 자신의 가면이 벗겨진 줄도 모르고, 착실하게 욕실로 들어서는 스페이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는 슬며시 웃었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상태로 움직이기도, 뭔가를 만지기도 찜찜하다. [그럼 뭘 할까?]라고 고민하던 그는 책상 위의 오래된 책을 발견했다. 굉장히 애지중지 관리된 듯, 빛이 바랬을 뿐 그 이외의 손상은 없었다. 그는 가죽으로 된 표지를 조심조심 펼쳤다.
「이건 성경?」
무심코 내뱉은 그의 말을 들은 스페이드가 멀리서 대답했다.
「세계에 몇 개 없는 겁니다. 조심히 다루십시오.」
「이거 구텐베르크 성경이라도 되는 건가?」
「초판본입니다.」
그는 한 장 넘기려다가 급히 손을 멈추고 조심스레 표지를 닫았다. [진심이었다. 진짜인가?]라고 한참을 고민하던 지오토가 다시 표지를 넘겼다. 손으로 쓴 머리글자, 자세히 바라보니 종이에 소 그림이 있었다. 무쿠로는 그가 관찰하는 장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조금 놀랐다. 전에도 본 적 있는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무쿠로의 예상이 맞았는지 그는 아주 쉽게 진위를 가려냈다.
[진본!?]
“설마하니 뛰어난 감정사로 알려졌는데 그걸 못 알아봤겠습니까.”
무쿠로가 무심히 말을 받는다.
구텐베르크 성경, 초판본은 지금 알려진 바로 49권만 남아 있다. 그러니 이건 50번째, 알려지지 않은 책이다. 몸 하나로 살아가던 스페이드가 소유한 유일하고도 물질적인 자산이었다. 그가 돈이 떨어지면 팔 요량으로 보관하던 것이다. 사실상 죽을 때까지 팔 생각이 없었던 것이기도 했다. 그의 성격상 무일푼이 되기 전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돈을 구할 테니까.
그렇게 나름 소중히 보관했었으나, 정작 지오토의 생일날 마땅한 선물이 떠오르지 않아 넘긴 것이기도 했다. 그건 지오토의 요청으로 만든 둘만의 비밀 창고에 보관되어 있을 것이다. 봉골레의 본부 어딘가에 있는 비밀 창고는 그와 비등한 능력자가 아니면 찾을 수 없게 해놓았으니 그대로 남아 있으리라.
이제 돈 걱정은 없겠군요. 무쿠로가 속삭였다.
「도둑맞았다는 이야기를 들지 못했는데?」
「50번째입니다.」
「어떻게 네가 이런 걸 가진 거지?」
「필연적, 이라고 해두겠습니다. 갖고 싶습니까?」
「그래도 괜찮은 건가?」
「그것의 주인은 나입니다. 내가 허락하면 그걸로 끝입니다.」
스페이드가 욕실에서 나오면서 대답했다. 어쩐지 그게 이상하게도 씁쓸해 보였다. 지오토는 그걸 감지하고 자기가 한 말을 떠올렸다. 이상한 말이 있었나? 아니, 없었다. 그럼 왜? 그는 가만히 스페이드를 바라봤다. 여전히 어딘가 불편해 보였다. 그건 아마도 그의 과거와 이어져 있으리라.
무쿠로는 지오토가 내린 결론을 듣고 가볍게 웃었다. 역시 간단히 알아차렸네요. 너무 시시한 수수께끼지 않습니까? 그건 스페이드가 집을 나올 때 들고 나온 유일한 물건이다. 지오토도 끝까지 몰랐던, 그의 과거. 그게 이제야 무쿠로의 입을 빌려 그의 과거가 조금 밝혀진다.
“명망 높은 시칠리아 마피아에 어울리지 않던, 생물학적으로 내 아버지인 인간이 가장 아끼던 것이었다. 자기 아내가 미쳐서 죽든, 그 자식이 정적들에게 살해당하든, 전부 내버려두고 오로지 출세를 위해 움직이던 인간이 모든 걸 걸고 구했었다. 고위 간부가 되기 위해 준비한 장물이라고 했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간부에게 이걸 상납하기 전날, 나는 이걸 들고 출사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처형되었다고 하더군요.”
보상 심리 같은 거창한 이유로 저지른 짓이 아니다. 그저 가장 가치 있어 보이는 것을 들고 나온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결과를 예상하고 있던 시점에서 계획적인 범행이었던 것이다. 스페이드가 자기 손으로 죽이기 싫었을 정도로 최악인 아버지였다.
스페이드는 자신의 감정을 무시하고 장롱을 열어 주섬주섬 옷을 꺼냈다. 대중없는 사이즈의 옷 틈에서 지오토에게 맞을 법한 사이즈를 찾아 주섬주섬 꺼냈다. 군데군데 여자 옷도 보였다. 입기 위해 샀다고 보기 어려운 조합이었다.
「왜 그렇게 옷을 사놓은 거지?」
「글쎄요, 이렇게 사용하는 날이 올 것 같아서?」
「거짓말.」
「그 잘난 초직감을 속일 생각이십니까, 보스?」
「진담도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요.」
그가 선선히 긍정하며 지오토의 앞에 몇 벌의 옷을 보여준다. 그가 살짝 고개를 기울인다. 어느 쪽? 지오토가 가볍게 고개짓 했다. 가운데. 그는 지오토가 고른 것 하나를 남겨두고 나머지는 다시 장롱에 잘 챙겨 넣었다. 그리고 뜬금없이 책상에 딸린 서랍을 열어 옷을 꺼냈다. 서랍에는 한 번도 입은 적 없어 보이는 서너 벌의 옷이 잘 정리되어 들어 있었다. [어째서 장롱이 아니라 여기에?]라고 잠시 고민하던 지오토는 무심코 정답을 깨닫고 한숨을 내쉬었다.
「스피.」
「왜 그러십니까?」
「떠날 생각인가?」
그의 눈이 살짝 커졌다. 조금 허를 찔린 듯, 그는 가볍게 놀란 표정으로 살짝 웃는다. 설마하니 이런 걸로 알아차릴 거라 생각도 못했었거든요. 너무 무시한 것 같다고 무쿠로가 당시의 심정을 고한다.
지오토는 그의 반응에서 이맛살을 찌푸렸다. 자신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없게, 모호한 종류의 옷으로 장롱을 채우고 자신이 사용하는 진짜 옷은 서랍에 넣어뒀다. 떠낼 때 책상만 가져가면 되게, 혹은 책상만 처리하면 되게 해 놓은 것이다. 언제든지 떠날 수 있게, 최소한의 옷만 준비해 둔 것도 그 탓이겠지. [역시 아직도 진짜 가족이 되지 못했다.]라는 지오토의 상념이 어쩐지 무쿠로에게는 무겁게 다가왔다. 지금도 그는 이방인이었고, 그의 가족(Family)이 될 생각이 없었다. 그런 것 따위, 아직도 무엇인지 모르니까.
「역시 그렇게 입고 다니는 것도?」
「뭐…… 이렇게 정착할 예정이 없었습니다. 죽는다면 객사(客死)였을 테니 적어도 내가 누군지는 알게 하고 싶었습니다.」
「이곳에 살았었다는 흔적도 남기지 않았을 거면서?」
「버릇입니다. 난 이름에 걸맞은 형태가 될 예정이었으니까요.」
데몬(Demon), 신과 인간 중간에 있다는 Daimon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후대에 이교(異敎)의 신을 칭하는 말이 되었다. 어느 쪽이건, 실존과는 거리가 멀다. 이름에 걸맞은 형태, 존재가 아니라 형태라는 점에서 자신도 그 허무함을 안다는 걸 알려준다. 그는 지상에 닿지도, 하늘에 오르지도 못하는 존재였다. 해가 높이 떠오르면, 밤이 깊어지면 자연히 사라질 현상인 안개와도 같은 자.
지오토는 그가 닫았던 서랍을 다시 열어 뒤적였다.
「멀쩡한 옷이군.」
「그럼 어떠리라 생각한 겁니까?」
「그거, 그만 입고 다녀.」
「사생활에까지 관여하실 생각이십니까?」
「어, 스피는 ‘내 것’이니까.」
스페이드가 살짝 한숨을 내쉰다. 왜 또 골이 났느냐는 시선이 따가울 법도 하건만, 그는 무시했다. 그는 정말 그냥 스페이드를 붙잡고 싶었다. 땅으로 끌어내리고 싶었다. 그럴 수 없다면 하늘이 되어 품고 싶었다. 자기 곁에 실제로 존재하게 만들고 싶다. 그딴 것에 빼앗기고 싶지 않아. 그는 자신이 외면하던 것을 직시했다.
[그래, ‘내 것’이다. 절대 빼앗기지 않아.]
그게 어떤 마음인지도 모르면서, 넌 그저 함께 살아가기를 원했던 겁니까? 무쿠로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아까까지 하던 고민은 어느 틈엔가 사라졌다. 지금은 그냥 마음이 먹먹하다는 것밖에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웃기지도 않은 인연이다. 스페이드가 지오토와 함께 할 수 없으리라 여긴 날, 지오토는 그를 붙잡길 갈망하게 되었으니 처음부터 비틀린 셈이다. 어떻게 이럴 수 있었을까? 지오토, 대답해 줄 수 있습니까? 난 너만은 욕심내지 않기로 했습니다. 난 온건하게 소유하는 방법을 모르니까. 그런데 넌 나만을 갈망했었습니까? 단지 살아가게 하고 싶어서? 함께 살아가고 싶어서?
몰랐다,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 자신의 마음도, 지오토의 마음도. 어느 하나 아는 것이 없었다. 그의 기억을 속박하는 건 오로지 하나, 자기가 지오토를 죽였다는 것이 전부다. 그래서 도리어 더욱 용서할 수 없었다. 그의 마음이 깊고 따스해서, 그게 너무나도 소중해서 그걸 부숴버린 자신을 용납할 수 없다. 이 내가, 이런 너를 죽였다는 거지요. 네, 그랬던 겁니다. 저절로 탄식이 새어나온다.
「일단 젖은 옷을 벗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보스.」
「대답은?」
「벗기 어려울 테니 돕겠습니다.」
「스피.」
스페이드는 그저 빙긋 웃으며 왜 부르냐는 시선을 보낸다. 얄밉도록 변하지 않는다. 지오토의 눈이 그런 기분을 반영하며 가늘어졌다. 그러면서도 순순히 옷을 벗었다. 물에 젖어 축 늘어진 망토를 벗고, 양복도 주섬주섬 벗었다. 몸에 딱 맞는 정장이라 팔을 빼기 위해 여러모로 고생해야 했지만, 스페이드의 도움으로 우야 부야 벗을 수 있었다. 셔츠도 그렇게 간신히 벗었고, 그 위에 커다란 수건을 덮었다. 그 사이 스페이드는 사이즈가 맞는 가운이 있을 거라면서 주섬주섬 장롱을 뒤진다.
생각해보면 이 방에 들어오기 전까지 몹시 추웠는데, 지금은 조금 따뜻한 쪽이다. 그러나 어디에도 난방기구가 보이지 않았다.
「따뜻한데?」
「이 주위는 따뜻한 봄의 온도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환각으로?」
「돈으로, 입니다. 아무리 나라도 그렇게 힘을 쓰면 서 있지도 못합니다.」
「불가능이 아니라는 거군.」
그는 그냥 웃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리고 자신의 겉옷도 그제야 벗기 시작했다. 바닥에 흥건한 물기는 환각으로 소거시키면서 젖은 옷들을 한쪽에 담았다. 그런 그의 느릿한 행동을 바라보면서 지오토가 문득 기이한 말을 했다. 너무 뜬금없는 말이라 잘못 들었나 싶어서 스페이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참을 고민하던 그가 지오토를 돌아봤다.
「흐음?」
「그 머리 만져보고 싶다고.」
「술을 너무 마셨군요. 당연히 안 됩니다.」
단호한 목소리다. [하긴, 저 자존심에 허락할 리 없지.] 그래도 만져 보고 싶었다는 건 진심이었던지라 지오토는 굉장히 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표정을 지어도 허락하지 않습니다. 될 리가 있다고 봅니까? 인상만 쓰던 스페이드의 속내를 무쿠로가 까발렸다. 아주 쉽게 알 수 있건만 아쉬워하는 게 이상합니다.
어쨌든, 지오토는 목적을 바꿔 물었다.
「그럼, 진짜 이름은 뭐지?」
「데몬 스페이드입니다. 이상한 보스는 스피라고 부르지요.」
「어릴 때 이름은?」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명령이라도?」
「버린 걸 다시 주워담을 이유는 없습니다.」
무심한 어조였지만, 어쩐지 씁쓸하게 들려서 지오토는 캐묻지 않았다. 그래서 지오토는 물론이고 봉골레의 패밀리는 끝까지 그의 진짜 이름을 몰랐다. 사하퀴엘 로렌츠. 무쿠로가 오래전에 버렸던 것을 입에 담았다. 그 의미는 신의 창의성, 그래서인지 그는 어릴 때부터 환술에 뛰어났었다. 그때는 그래도 아버지에게 이용가치가 있어서 그럭저럭 대접을 받았었다. 다 옛날이야기지만.
「부모님은?」
「있긴 합니다.」
나도 인간이니까요. 장난스레 덧붙였지만,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니다. 그의 부모는 모두 죽었다. 반쯤 미쳤다가 병으로 죽은 어머니와 척살된 아버지는 추억거리도 못된다. 「형제는?」「비슷합니다.」역시 다 죽었다. 그 시체를 대부분 스페이드, 스스로 처리했었다. 행복했던 기억이 하나도 없던 형제들이라 이젠 진짜 이름도 가물가물했다. 참 하찮은 가족관계였군요. 무쿠로가 대신 한숨을 내쉬었다. 돌이켜보면 지금까지 정상적인 가족이었던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럼…….」
「호구조사입니까? 술을 너무 많이 마셨군요.」
그건 꽤 노골적이고도 단정적인 거부였다. 이야기할 거리가 없었기에 더 날카롭게 반응했었다. 지오토는 잠시 멈칫하다가 그게 화를 내는 게 아니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그래서 그냥 그런가, 라고 흘려버릴 따름이다. 그리고 더는 묻지 않았다. 그가 말하고 싶어 하지 않다고 느낀 탓이다. 앞서 계속 이야기했지만, 그 초직감은 사기입니다. 이젠 놀랍지도 않은 어투로 무쿠로가 덧붙인다.
[그냥, 알고 싶었을 뿐인데……. 네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떻게 자랐는지 알고 싶었다. 가까워지고 싶다. 하지만, 넌 아무것도 묻지 않겠지. 나에 대해 알려고도 하지 않을 테지. 지금까지 몰라도 불편함이 없었으니까.]
정답이라 따로 덧붙일 말도 없을 정도네요. 이런 건 그가 지오토에게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현재밖에 없는 인간이라 그랬던 것이다. 현재가 중요하지, 이미 지나간 과거는 몰라도 된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니 그는 현재의 지오토만 알면 그만이었다. 모른다고 해서 현재가 변할 리 없다고 여겼으니까. 이젠 아니라는 걸 알지만, 말입니다. 무쿠로는 슬쩍 웃었다.
그때까지 스페이드는 그때까지 어렵사리 옷을 벗고 있었다. 졸지에 할 일이 없어진 지오토는 슬쩍 책상의 서랍을 뒤적였다. 그러다 낯익은 상자를 발견하고 꺼내 들었다. 무감각하던 표정이 슬며시 일그러진다.
「스피~?」
「무슨 일입니까?」
「이거 내가 준 선물 맞지?」
「…… 그럴 겁니다.」
「뜯지도 않은 건가?」
「그렇게 되었습니다만……?」
이상할 정도로 살벌해진 지오토의 눈초리에 그는 어색하게 시선을 돌렸다. 그가 왜 화를 내는 지 이해하지 못한 탓이다. 그냥 누군가에게 순수한 호의로 선물을 받은 건 처음이었고, 설마하니 지오토가 주리라고는 생각도 못한 탓에 너무 소중해져서 그대로 둔 거다. 사정을 이야기하자면 그렇지만, 준 입장에서는 그냥 사줬더니 방치하고 있었던 것일 뿐이다. 덕분에 자기가 준 선물이 방치된 모습을 발견한 지오토는 살벌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봤다. 당연히 그런 쪽으로는 전혀 면역이 없었던 그는 영문을 몰라 그저 슬며시 욕실로 몸을 피했다.
[바보.]
“그러게요.”
무쿠로가 성의 없이 답하며 침대에 털썩 앉았다. 혹시나 해서 앉았건만, 역시나 딱딱하다. 이런 건 푹신해도 될 텐데요. 그는 가볍게 투덜거리며 지오토를 바라봤다. 지오토는 자기가 했던 포장 그대로 남아 있는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않는 지 한참을 노려보다가 기어코 자기가 뜯어버린다. 끈을 풀고, 포장지를 뜯고, 상자를 열어 고민 끝에 샀던 선물을 끄집어냈다. 스페이드의 머리카락과 그 눈동자 색을 닮은 감색의 실크 넥타이였다.
「스피~ 이러와.」
「오라면 가야 합니까?」
「응.」
「어째서요?」
「스피는 내 것이잖아.」
거기다 난 보스라고. 지오토는 무심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포커를 치는 게 아니었다, 라고 후회했었죠. 무쿠로는 벌러덩 침대 위에 늘어졌다. 이후에 벌어질 일을 안다. 알기 때문에 짜증이 났다. 자신을 향한 분노가, 그 어리석음이 너무 싫다. 널 만나는 게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만나버렸다. 만난 순간 전부 기억나 버려서 떠나지도 못하게 되었다. 차라리 행복한 기억만 갖고 있었다면, 그랬다면……. 후회는 언제나 어리석게 이어진다.
「무슨 일입니까?」
스페이드는 좀 더 가까이 오라는 지오토의 손짓에 한숨을 내쉬며 다가갔다. 무슨 일이냐고, 거듭 물으니, 그가 질 좋은 실크 넥타이를 스페이드의 목에 걸었다. 스페이드는 슬쩍 주위를 훑어보고 그 넥타이의 출처를 알았다. 뜯긴 포장이 조금 아쉽다는 생각에 그냥 웃어버렸다. 뜯을까 말까, 수차례 고민하다가 결국 말았었다. 그 후로도 틈틈이 꺼내봤었다. 안에 뭐가 들었을까, 라고 기대하면서 쓸데없이 만지작거리다가 다시 집어넣었었다.
그렇게 소중해서 가지고만 있던 선물은 결국, 선물을 준 사람의 손에 열렸다.
「이게 선물이었습니까?」
「어, 적어도 정장을 입히고 싶었거든. 머리 좀 숙여, 쓸데없이 커서 메기 어려워.」
「보스가 필요 이상 작은 겁니다.」
「졸라버린다.」
「그거 무섭군요.」
조금도 무섭지 않다는 표정으로 스페이드가 고개를 숙였다. [진짜 졸라 볼까?] 잠시지만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던 지오토는 곧 넥타이를 매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게 매어주는 건 처음이라 이래저래 실수를 많이 했지만, 스페이드는 그걸 그냥 지켜보기만 했다. 스스로 매는 법을 몰라서가 아니다. 그럼 왜? 답을 피하고 일부러 의문을 떠올렸었다. 그러기 전에 떨어져야 한다는 걸 잊었었죠. 그래, 잊어버렸다.
지오토는 문득 얌전히 고개를 숙인 그의 머리에 뻗었다. 무심코, 정말 별생각 없이 그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는다. 그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뭐 하는 겁니까?」
「어떤 구조인지 궁금해서…….」
그런데 만져도 모르겠다. 지오토는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한 태도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도 모르게 어떻게 된 구조인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네, 등의 말을 한다. 갑자기 불러서 뭘 하나 했더니……. 스페이드는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고개를 들었다. 그에 놀란 지오토가 급히 넥타이를 잡아당겼다. 지오토의 힘은 가늘어 보이는 몸에 비해 굉장히 강하다. 그런 힘에 잡아 당겨졌으니, 그 반동으로 스페이드의 고개가 확 숙여졌다. 그게 꽤 아팠는지 살짝 인상을 찌푸렸지만, 변함없이 섬세하고도 단정한 얼굴이다.
지오토는 그와 이렇게 가까이에서 얼굴을 마주한 적 없다. 그래서였을까? 아니면 그냥, 정말 단순한 충동이었을까? 지오토는 무심결에 새가 쪼듯, 날아갈 듯 가볍게 입을 맞췄다. 한 사람도 당한 사람도 그대로 굳었다. 나에게만 기행을 일삼는 보스라지만, 이거 뭡니까? 스페이드의 표정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이건 뭡니까?」
「…… 키스?」
그걸 몰라서 물었겠습니까? 당황한 건 알겠지만, 바보 같네요. 무쿠로는 몸을 굴리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이게 TV라면 그냥 꺼버렸을 텐데 말이죠. 보기 싫다, 라는 게 그의 심정이었다. 추억은 추억일 뿐이다. 돌아오지 않는 이상, 저기에 있는 주인공이 다시 자신이 될 수 없다. 추억은 아름답지만, 그만큼 보기 괴로웠다. 행복했기 때문에 화가 나는 거다. 잃어버렸으니까, 그리고 ‘저건’ 자신이…… 로쿠도 무쿠로가 아니니까. 기억은 마음일까? 기억이 있으면 마음도 따르는 걸까? 무쿠로는 눈을 감고, 귀를 막았다. 어리석은 자문(自問)에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감정이 자답(自答)한다. 그러니 너에게 묻겠습니다.
「“말을 바꾸죠, 무슨 의미입니까?”」
[그러게 무슨 의미였을까? 그냥, 정말 단지 하고 싶어서 했다. 나는 왜 그랬지? 아니, 알아. 그건 나답지 않은 감정이다.]
조금 혼란스러워하던 지오토는 금방 감정을 다잡았다. 외면하던 답을 직시했다.
「글쎄, 한 번 더 해보면 알겠는데?」
그는 짓궂게 웃으며 다시 메마른 입술을 찾았다. 동요된 감정 때문에 바싹 말랐던 입술은 그걸 피하지 않았다. 함께하고 싶다는 것과 같은 세계에 존재할 수 없다는 모순이 스페이드를 괴롭혔다. 너에게는 나보다 너처럼 하늘을 닮은 사람이 어울린다. 그는 자신이 비정상적인 존재라는 걸 잘 알았다. 그렇기에 거부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지오토를 놓고 싶지 않았다. 그는 결국 씁쓸하게 웃으며 「그렇습니까?」라고 작게 속삭였다.
[기뻐하는 게 아니다, 그렇다고 싫어하는 것도 아니다. 어째서 넌 이런 곳에서까지 모호한 거지?]
잡고 싶다, 잡아야 한다. 지오토는 그의 모순을 깨닫는 순간, 자신의 감정을 확인했다. 모든 것을 포용하던 대공이 단 하나를 갈망한다. 아니, 알고 있었으면서 지금까지 모르는 척했을 뿐이다. 그렇기에 지오토는 그를 처음부터 ‘안개’의 수호자로 만들었다. 안개는 아무리 자욱해도 하늘에 닿지 않는다. 하늘은 아무리 갈망해도 안개를 붙잡을 수 없다. 그건 해가 뜨면 사라질 환상이니까.
가질 수 없기에 갈망한다. 그건 확고한 소유욕이었다. 사람을 가질 수 있어? 나만의 것으로 만들 수 있어? 그래도 돼? 지오토는 그런 속내를 숨기지 않았다. 선연히 드러난 감정은 자연히 그의 입가에 담겼다. 무심하던 얼굴 가득 환한 웃음을 담는다. 그 스페이드가 홀려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할 정도로 아찔한 미소였다.
「데몬 스페이드, D. 스페이드, 데몬, D, 스페이드.」
언제나 모호하던 그의 심리에 지오토가 선뜻 접촉했다. 손으로 더듬듯 느긋하게 그의 이름을 부르며 천천히 감정을 흔들었다. 당황한 그가 다시 연막을 치기 전에 그의 진심을 그러쥔다. 그리고 그가 차마 이름 붙이지 못했던 감정이 완전히 형태를 잡고, 빼앗았다. 그걸 확인하듯 지오토가 속삭인다.
「스피, …… 나의 스피. 어느 쪽이 마음에 들지?」
나만의 스피. 지오토가 환하게 웃었다. 그의 직감에 의하면,
「…… 스피…… 로 하죠.」
스페이드도 그와 같은 마음.
“치사해요, 지오토.”
초직감으로 이미 답을 알고 있으면서 거절할 수 없는 말을 하다니 말이지요. 무쿠로는 숨죽여 웃었다. 기억은 너무 달콤해서 숨도 쉴 수 없게 한다. 그렇기에 더 괴롭다. 이 기억은 이제 어떤 의미입니까, 사와다 츠나요시. 네가 나에게 집착하는 건 단순히 그의 기억 때문입니까? 대답해줘, 아니 대답하지마. 흔들리는 마음을 누군가가 비웃는다. 벗어날 수 있다고 보는 거야? 라고 소곤거린다. 누가, 누구에게서? 대답하지 못할 질문을 자기에게 던지며 그는 몸을 움츠렸다. 시원하게 속마음을 털어놓고 싶다. 아무리 그래도 아직은 아냐, 아직은 안돼! 그는 이성을 브레이크로 삼아 폭주하는 마음을 다잡는다.
그런 그에게 지오토의 생각이 스며들었다.
[이상하군, 왜 아직도 멀게 느껴지지?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
“그야, 그런 부분에서는 완고하니까요.”
함께 할 수 없다고 절감했었으니까 쉽게 마음을 돌리지 못하는 거다. 그렇다고 외면하거나 모르는 척하지도 못한다. 떠난다는 건 진정으로 불가능했다. 처음부터 비틀린 존재였기에 애달픈 마음이 모순되는 것도 순식간이다. 그래서 스페이드는 그냥 웃었다. 자신이 너무 어리석어서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일단, 씻도록 하세요. 준비는 끝났으니 이제 들어가면 됩니다. 갈아입을 옷도 준비해 뒀으니 그 정도는 혼자 할 수 있겠지요?」
어린애를 달래는 말투다. 덕분에 지오토가 [날 놀리는 건가?]라는 생각을 할 정도로 기이한 태도였다. 분명히 서로 사랑한다고, 그걸 확신했건만 왜 이런 반응이야? 그의 이맛살이 슬며시 찌푸려졌다. [이걸 어쩔까?] 그는 잠시지만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러다 유쾌한 듯 웃는 스페이드에게 귀여운 척 마주 웃었다.
「스피도 같이 들어가자. 응?」
「뭐 하는 겁니까?」
「이걸 바라는 거 아니었나?」
「그렇게 해석될 수도 있군요. 앞으로는 유의하겠습니다.」
스페이드가 못 볼 걸 봤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젓는다. 그러면서 한걸음 물러나는 꼴이 얄밉다. 「이상한 짓은 네가 먼저 했잖아!」 지오토가 불만스럽게 넥타이를 잡아당겼다. 「그만 당기세요, 이게 무슨 조련용 목줄입니까?」 그렇게 저항하던 그는 넥타이가 끊어질 듯 팽팽히 당겨지자 항복했다. 소중한 선물이라, 망가뜨릴 수 없어서다.
지금은 어디에? 어디에도 없어, 그때 같이 다 타버렸잖아. 무쿠로는 무심코 자문자답하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어쩐지 멍한 표정으로 구석으로 걸어간다. 그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곤란합니다. 아니, 조금만 더……. 신음처럼 속삭이며 고개를 숙이고 주저앉았다. 그 순간, 그는 진짜 그곳에서 자신을 유리(遊離)시켰다.
「어쨌든, 같이 들어가자.」
「달갑지 않습니다만?」
「고집부리지마, 스피. 입술이 새파랗게 질렸어.」
지오토가 스페이드의 입술에 손을 가져갔다. 정작 스페이드는 곤란한 듯 인상을 쓰며 고개를 돌려 그 손길을 피했다. 감정적으로 둔한 사람이라 몸까지 피곤한 상황에서 과도하게 심력을 소모하니 피로가 중첩된다. 거기다 젖은 상태라 체온은 계속 빼앗기는 중이라 농담이 아니라 진짜 기절할 것 같았다. 오로지 이성의 힘으로 멀쩡한 척하는 중이니 감정에 휘말리는 순간 뻗는다. 그런 꼴사나운 모습을 보일 것 같습니까? 그는 속으로 이를 악물었다.
「보스가 이런 상태로 계속 있으면, 나도 이대로 있을 겁니다. 그게 싫으면 어서 들어가세요.」
「좋아, 그럼 안내하도록.」
좀 더 실랑이할 것 같았는데, 지오토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좁은 방안에 무슨 안내가 필요하나 싶지만, 하라면 해야지. 왜 그래야 하느냐고 따질 기력도 없어서, 스페이드는 느릿하게 앞장섰다. 실랑이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 기뻐서 발걸음도 어쩐지 가볍다. 그래서 ‘어째서’ 지오토가 쉽게 넘어갔는지 생각해보지 않았다. 피곤해서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서다. 그냥 감정이 흔들리는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어서다.
지오토가 슬쩍 웃는 얼굴로 그 뒤를 가볍게 따랐다.
「여기입…….」
그리고 스페이드는 오늘 두 번째 물에 빠졌다.
스페이드를 욕조에 던져 넣은 지오토가 생글생글 웃으면서 「신발은 벗어야지.」라며 그의 신발까지 벗겨줬다. 그는 진짜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는 데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분명히 그냥 안내만 하려고 했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요?」 멍하니 중얼거리는 모습이 신기해서 지오토는 한참 동안 숨죽여 웃었다. 「계획이었던 겁니까, 보스?」 그가 중얼중얼 생각나는 대로 내뱉는다. 어째 진짜 화난 것 같아서 그제야 지오토는 웃음을 멈췄다.
이윽고 정리가 끝났는지, 그가 이를 갈면서 뭔가 잘 들리지도 않는 목소리로 뭔가를 중얼거린다. 분명히 성격대로 꼬인 말이겠지만, 그게 뭔지 궁금하다. 지오토는 자기도 취향이 별나다고 생각하면서 몸을 기울였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스페이드가 그를 욕조 속으로 끌어당겼다. 지오토는 조금 허망하게 이게 목적이었나 보다, 라고 생각했다. 아직 조금 말랐던 옷이 다시 젖어서 아깝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게 다였다. 지오토의 목적은 일단 같이 씻는 거였으니까.
「옷 벗는 거 좀 도와줘.」
「너, 다른 사람에게 뻔뻔하다고 잘도 말하는군요. 양심은 어디에 갔다 버렸습니까?」
「자기 이야기를 남에게 하는 건 나쁜 행동이야, 스피.」
「지금 누구 이야기를 하는 겁니까?」
「스피.」
스페이드가 벌떡 몸을 일으키자, 그가 반사적으로 붙잡는다. 놔요. 성질 급하긴, 앉아. 싫습니다. 스피는 착한 아이지? 너 진짜 죽고 싶습니까? 스피~. 그러한 눈빛이 오간다. 아주 당연한 말이지만, 이 실랑이의 승리자는 지오토였다. 스페이드가 아무리 싫다고 발악해도 조금 풀이 죽은 기색의 그를 못 이긴다. 고작 기색인데, 고작 그래 보이는 수준인데! 스페이드가 속으로 자기에게 절규해 봐도 몸은 이미 그의 곁에 앉았다. 아, 젠장.
이러리라 예상한 건 지오토도 마찬가지였기에 아주 만족스러운 미소를 그렸다. 스페이드가 자신에게 약한 건 처음부터 알았으니까. 요는 그런 마음을 인정하기까지의 시간이다. 어째 다 낚였음에도 인정하지 않으려고 발악하는 것 같아서 재미있다고나 할까? 스페이드가 난리가 날 생각이었지만, 불행히도 그에게 독심술은 없었다. 단지 지오토가 너무 즐거워 보여서 기분 나쁘다며 인상을 찌푸릴 따름이다.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스스로 벗을 겁니까, 내가 벗겨 드릴까요?」
「과연 장소와 말하는 사람에 따라 같은 말이라도 다르게 들리는 거로군. 스피는 유난히 심하네.」
「확실히 그렇군요. 지오토, 도발도 대담한 것도 좋습니다만, 내일 못 일어나도 괜찮은 겁니까?」
「무슨 의미냐고 따져도 되는 걸까?」
「시작은 너였습니다. 그래서 어느 쪽입니까?」
「스피를 벗기는 쪽.」
어쩐지 장난기 어린 목소리다. 이건 확실히 반응이 궁금해서 한 말이리라. 그는 슬쩍 인상을 쓰다가 그냥 그 선택지를 무시하기로 했다. 오래 생각해봤자 피곤한 일이고, 실랑이를 해봤자 피곤한 일이고, 이대로 욕조에 있는 것도 피곤한 일이고……. 그는 어쩐지 생각이 하나로 귀결되는 것 같아서 잠시 머리를 흔들었다. 이성으로 다잡기 어려울 정도로 피곤한 것 같다. 피곤을 풀려면 휴식을 취해야 한다. 즉, 이 상황을 어떻게든 마무리 지어야 한다. 그가 그런 결론을 내리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렸고, 지오토가 「반응이 없네?」라면서 슬금슬금 그의 옷을 벗기고 있었다.
그는 순간 말문이 막혀서 지오토의 행동을 멍하니 지켜봤다. 그러다 내린 결론이,
「굉장히 서툴군요.」
「그야 처음이니까.」
「젖었다고는 해도 남자 옷입니다. 드레스를 벗기기보다 훨씬 쉽습니다. 드레스가 젖었다면 더 어렵죠.」
「스스로 벗어줘서 벗길 일이 없었어.」
「벗겨주길 원하는 쪽도 없었습니까?」
「스피는 많았었나?」
「꽤…… 잠깐, 넥타이는 목줄이 아닙니다. 그만 잡아당기세요. 조르지도 마세요! 왜 갑자기 화내는 겁니까?」
스페이드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해하지 못하는 티가 너무 나서 화내지도 못하겠다. 지오토는 속으로만 혀를 차며 설명해보라는 그의 눈빛을 무시했다. 정확하게는 머릿속이 복잡해서 설명할 생각도 못했다. 그는 일단, 겉만 보면 잘생기고 능력도 좋으니까 여러 사람이 꼬였을 수 있다. 어차피 그의 마음이 움직인 적 없었을 거니까 상관없지 않…… 은건 아니다. 그래, 아니다. 어쩐지 다시 화가 나는 것 같은데…… 왜 그는 이런 쪽에서만 둔한 걸까? 이해하지 못한다는 쪽이 맞으려나?
그는 깊은 생각에 잠겨 계속 넥타이를 잡아당기는 지오토의 팔을 막아야 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이러다 진짜 끊어집니다. 그만 당기세요!」 그제야 점점 손에 힘을 주던 지오토가 멈췄다. 이윽고 다시 작업을 재개한다.
「벗기기 어려우니까 어서 협조해.」
「하아……, 넥타이부터 풀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푸는 법, 잊어버렸……. 내가 묶어줬잖아. 마음대로 풀지마!」
그가 그렇게 외친 순간 스페이드가 지은 표정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지오토로 하여금 그의 머리를 후려치게 할 정도다. 모든 것을 포용하는 하늘이라도 수용하지 못하는 게 있기 마련이다. 덕분에 스페이드는 약 10초간 기절했다가 깨어났다. 그는 그대로 잠들지 않기 위해 울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억지로 정신을 차린다. 조금 미안해진 지오토가 자기가 때린 곳을 살살 문질러줬다. 병 주고 약 주는 겁니까? 그래도 스페이드는 아주 얌전히 그 손길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의 다른 손을 꼭 잡았다.
「이제 그냥 스스로 하겠습니다. 네 옷이나 벗어요.」
「조금만 하면 다 벗기니까 내가 하겠어.」
「속옷까지 벗겨줄 필요는 조금도 없으니까, 그쯤하고 너나 벗으세요. 아니면 벗겨 드릴까요?」
어쩐지 숙련가의 분위기가 난다. 하긴, 이 상태에서 벗는 건 어렵지. 지오토는 선선히 그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사족을 달자면 그는 정말 능숙했고, 몇 초 지나지 않아 지오토는 거의 알몸이 되었다.
「스피, 멈춰! 내가 벗길 때는 싫어했으면서 어째서 자연스럽게 속옷까지 벗기려고 하는 거지?」
「아, 실례했습니다. 늘 그러다 보니 보스라는 걸 잠시 잊었……. 왜 또 화내는 겁니까? 어째서?」
그는 이번에도 이해하지 못했다. 생각해보면 딱히 화낼 일은 아니다. 지오토도 육체적인 관계에 있는 여성도 있었으니까. 애초에 깨끗하게 지낼 수 없는 뒷세계다. 광기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관계다. 그건 지오토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저 그가 남녀 가리지 않고 익숙한 것 같아서 화가 난 거다. 어떻게 살았던 건지 반드시 물으리라. 명령해서라도 듣고 말 거다!
그는 뭔가 굳게 다짐하는 지오토를 멍하니 바라봤다. 그에게는 그 모든 게 그냥 투정으로 보였다. 화난 것 같긴 한데, 그냥 투정 같다니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는 그냥 넘어갔다. 피곤하니 머리가 잘 굴러가지 않은 탓이다. 어떻게든 달래서 빨리 끝내야겠다는 생각만이 오락가락한다. 「무조건 항복입니다. 뭐든 할 테니 이제 화를 푸세요.」 그에 지오토는 당당히 요구했다.
「스피, 눈이 따갑진 않아?」
「괜찮습니다만, 앞으로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로 화내지 않겠다는 것과 내 머리를 감기겠다는 걸 교환하다니, 손해인 거 아닙니까?」
「화내는 이유를 설명하겠다는 거니까, 딱히 손해는 아니지. 그건 그렇고 역시 구조를 모르겠군.」
「이건 화내도 되겠지요?」
그는 조용히 자신의 분노를 피력했다.
그 후에 잠시간의 침묵이 흐른 후, 그는 욕조에서 잠들어버린 지오토를 침대로 배달해야 했다. 물론 이상하게 조용해서 돌아보고 잠든 지오토를 발견한 뒤, 그가 지었던 표정은 그야말로 해탈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에게 그런 기분을 맛보게 할 수 있는 건 지오토 밖에 없으리라. 그는 그렇게 자기도 기절할 것 같은 상태로, 오로지 정신력 하나만으로 버텼다. 그는 그 근성으로 지오토에게 옷도 입혀주고, 침대에 잘 눕혀준 후, 따로 꺼내놨던 이불을 챙겼다. 그리고 침대 대신 사용할 수 있는 소파에 이불을 돌돌 말고 누웠다. 이제는 쉬어도 된다고 생각한 순간, 그는 그대로 기절했다.
이상하게 끊었네요.
그런데 이후의 내용의 분위기도 그렇고 해서 좀 잘랐습니다.
지오토가 알려주는 넥타이의 올바른 사용법입니다.
네, 저는 저게 올바른 사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틀려도 괜찮아![...]
추가할 말이 많았던 것 같은데 왜 기억이 안날까요?
순간기억상실증인가?
메모해두는 습관을 가져야 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진짜 같은 양이 더 있어야 이 편의 완결이지만, 너무 길어져서 잘라버렸습니다.
양조절하는 법 좀 누가 가르쳐 줬으면 좋겠네요.
그런데 편수 조절만이라도 하고자 그냥 붙였습니다.
이거 몇장인지 묻지 말아주세요, 저도 모르겠어요.
모르고 싶어요.
아니, 계속 쓰는데 이상하게 끝이 안나서…
꽤 오글거리는 닭살 커플입니다.
문제점이 많았고, 그걸 캐치하지 못해서 쪽박난 거죠.
무쿠로는 수로 외각에 앉아서 기다렸다. 이날 그는 10월이라 무거운 외투 때문에 사투를 벌이며 잠영을 했었다. 반쯤 의식불명상태의 지오토를 끌고, 죽을힘으로 헤엄쳤었다. 정말 힘들었었다. 지금 돌아보면 다 추억이라는 게 어쩐지 무섭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며 기다리고 있자니, 까만 가죽 장갑을 낀 손이 하나 올라온다. 그건 턱 하니 외각의 턱을 잡았다. 그리고 잠시 시간을 두고 두 그림자가 솟아올랐다. 이때 힘이 부족해서 죽기 살기로 환술을 사용해야 했었다. 속이 울렁거리고 죽을 것 같았지만,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멀쩡한 척 서 있었다. 쓸데없는 오기가 따로 없었습니다. 고소를 그리며 중얼거린다.
그에 반해 지오토는 주저앉아서 멍하니 손을 들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물이 뚝뚝 떨어지는 상태다. 그걸 흘깃 본 스페이드가 냉소적인 어조로 중얼거렸다. 저거 나름 걱정이었습니다. 무쿠로가 변명처럼 주석을 달았다.
「이런 경험은 또 처음입니다.」
「…… 웩, 물 먹었어…….」
「하아? 정말 잘하는 짓입니다, 지오토.」
맥 빠진 어투로 그가 말한다. 지오토는 굉장히 미묘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굉장히 복잡한 심경이 뒤범벅된 표정이라 지켜보던 무쿠로가 놀랄 정도였다. 감정표현이 극히 드문 지오토였기에, 마지막 순간에만 보이던 모습이었다. 무심코 그 순간을 떠올린 무쿠로의 표정이 살짝 굳는다.
[지금 이름으로 부른 건가? 언제나 너, 아니면 보스였는데?]
순간적으로 조금 창백하던 지오토의 얼굴에 혈색이 돌았다. 기묘한 술렁임이 인다. 쿵쿵거리는 심장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이름이란 신기한 거네요. 무쿠로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다가 [술기운이 오른 건가?]라는 지오토의 생각에 넘어질 뻔했다. 둔한 건 알고 있었지만, 그거 진심으로 생각한 겁니까?! 무쿠로는 정말 그렇게 묻고 싶었다. 갑작스러운 두통이 급습했다. 날 놀리는 겁니까? 어쩐지 그렇게 따지고도 싶어졌다. 어째 또 낚인 기분이라 한숨도 같이 흐른다.
「내 이름, 기억하고 있었나?」
「G가 그렇게 불러대는데 모르리라 생각했습니까?」
그가 멀뚱히 돌아보며 도리어 묻는다. 잠시 G의 행적을 돌이켜보면 지오토가 이해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모르면 이상할 정도로 꼬박꼬박 지오토의 이름을 부르던 G다. 하지만, 그는 만나기 전부터 지오토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 잊지 않고 기억해준 게 아니라는 건가?]
“저 성질에 그런 말을 할 것 같습니까?”
무쿠로가 회의적인 표정으로 토를 단다. 정말 많은 것을 바라고 있군요. 저 자존심과 성질머리에 그걸 인정할 리 있겠습니까? 무쿠로는 아주 냉정하게 자신을 평가했다. 그리고 그건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지오토는 그런 그를 슬쩍 노려보다가 어쩐지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명령했다.
「이런 상태로는 본부에 돌아갈 수 없다. 그러니 스피~네에 오늘 신세 좀 지고 돌아가겠다.」
「내 의견과는 상관없이 확정입니까?」
「물론. 명령을 거부할 생각인가?」
스페이드는 잠시 그런 그를 바라보다가 한숨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이길 수 없다,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었다. 너라는 사람은……! 같은 체념이 뒤따랐다. 이길 수 없는 상대에게 개개봤자 추해지기만 할 뿐이죠. 그래서 나는 너의 명령에 따랐다. 무쿠로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그건 사실 지금도 마찬가지인데…….
「…… 하아, 어쩔 수 없군요. 알았습니다. 따라오도록 하세요.」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앞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오토는 그대로 앉아서 멀뚱히 그의 뒷모습만 지켜봤다. 꽤 거리가 떨어지고 나서야 뒤따르는 기척이 없음을 알아차린 그가 급히 돌아온다. 그리고 꼼짝도 없이 앉아있는 지오토를 발견하고는 어이없음을 숨기지 않았다.
「뭐 하는 겁니까?」
「못 일어나겠어.」
「…… 장난합니까?」
「진짜 술기운 때문에 못 움직이겠다고. 장난 같은 거 아니다.」
스페이드는 기어코 해탈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린다. 뭐든 예상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이건 상상 이상이었습니다. 덩달아 무쿠로도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뻔뻔하다는 생각도 했지만, 그보다 이런 사람에게 약해진 자신이 신기했었다. 그런 감정에 거부감이 없다는 것까지도. 지금도 그래서 괜히 짜증이 일었다.
「정말 귀찮게 만드는 군요, 보스.」
「뭐, 정중하게 안내해라.」
「걷지도 못하면서 참 당당하기도 하십니다.」
그는 한숨을 쉬며 지오토에게 다가갔다. 그는 농담처럼 타박을 주었지만, 어쩐지 지오토의 표정이 어두워 보여서 괜히 찝찝했었다. 술에 많이 취한 것 같아서 자기 기준으로 저자세를 취하고 있건만,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도통 이해하지 못한 탓이다. 정작 지오토의 불만은 조금 다른 곳에 있었다. [다시 보스, 인가? 왜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 거지?]라는 아주 단순한 부분이었다. 조금 씁쓸하게 울리는 지오토의 생각에 무쿠로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저었다.
특별한 존재가 생긴다는 생소한 감각에 스페이드는 무의식적으로 지오토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이름을 부르지 않았었다. 눈치 빠른 그가 그런 신호를 모를 리 없다. 그저 인정할 수 없어서, 혹은 인정하기 무섭기에 멀어지려고 했을 뿐이다. 끝까지, 그는 자신이 지오토와 다른 세계에 존재한다고 생각했으니까. 그게 어리석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난 지금도 너와 나 사이에 깨트릴 수 없는 벽의 존재를 느낍니다. 단 한걸음, 그 거리가 서로에게 이득인 겁니다. 무쿠로는 그렇게 머릿속으로만 생각했다.
「이러면 되겠습니까?」
스페이드는 지오토를 가뿐히 안아 들고 물었다. 소위 말하는 공주님 안기 자세다. 지오토의 표정이 다시 묘하게 변한다. 뭔가 아닌 것 같은데, 콕 찍어서 이야기하기 어려운 듯했다. 그답지 않게 한참을 주저하다가 결국 한마디 던진다.
「이건 어딘가 이상한데?」
「가장 정중하게, 난 이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가볍게 대답하며 스페이드는 걸음을 옮겼다. 가벼운 걸음이었지만, 상당히 지쳐 있었던 그는 자기 집까지의 거리를 계산하며 지오토의 불만에 대강대강 대답하고 있었다. 성의없는 대답이었지만, 여과 없이 흘러나오는 진담인지라 지오토는 조금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그래도 이런 모습은 조금 곤란한지, 한마디를 더 던진다.
「그냥 업어.」
「그러다가 토하면 곤란합니다.」
「그게 문제인 건가?」
「물론이죠. 이 상태에서 토하려 하면 던져버릴 수 있지 않습니까?」
「심술부리지 마. 그냥 업어.」
「기각합니다. 어차피 보는 눈도 없으니 상관없지 않습니까?」
「진짜 스피~는 심술밖에 없군.」
「뭘 새삼스레.」
지오토가 노골적으로 한숨을 내쉬자, 스페이드는 상큼하게 웃는 얼굴로 답했다. 가까워지길, 특별한 존재를 만드는 걸 무서워했으면서 이런 면에서는 무방비했었군요. 무쿠로가 기분 나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건 과거의 한심한 작태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지금의 자신을 지배하는 애매한 감정 탓이다. 애매하기는커녕 너무 확연해서 짜증 날 정도였지만, 의도적으로 계속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 날 설득하고 싶어서 이 꿈을 꾸는 거라면 탁월한 선택이었습니다, 사와다 츠나요시. 그는 진짜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애써 참았다. 명확하게 만드는 순간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흐를 것이다. 그런 것쯤은 알고 있다.
무쿠로가 그런 생각에 잠긴 사이, 티격태격하던 그들은 스페이드의 집에 도착했다. 상당히 낡지만 어쩐지 고풍스러워 보이는 건물이었다. 독립주택이 아니라 맨션이라는 점이 조금 뜻밖이었을 뿐, 굉장히 멀쩡한 건물이었다. 그것에 조금 놀랐던 지오토는 곧 4층 복도 끝 호실에 들려가서는 깜짝 놀랐다.
회색의 방안에는 1인용 침대 하나와 장롱 하나, 긴 침대 같은 소파가 하나, 그리고 섬세한 문양이 새겨진 나무 책상과 의자 하나가 전부였다. 색감도 회색과 조금 무거운 밤색, 밝은 갈색 일색이다. 너무 수수해서 도리어 이상해 보일 정도였다. 지오토는 그런 감상을 한마디로 표현했다.
「멀쩡하잖아?」
「너한테 내가 어떤 이미지인지 아주 잘 알 것 같습니다.」
스페이드의 핀잔에 지오토는 그냥 슬쩍 웃을 따름이다. [그런 복장이라서 좀 특이할 줄 알았는데…….]라는 생각이 따갑다. 덕분에 지금 아주 특이한 환경에서 살아가게 된 무쿠로는 잠시 폐허가 된 고쿠요 랜드를 떠올리고 그냥 묵념했다. 돈을 구해서 개축해야겠습니다. 무쿠로는 가능하다면 반드시 그렇게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사실 거긴 사람이 살만한 곳은 아니다.
「스피~.」
「뭡니까?」
「이 주위에 들어갈 수 없는 방이 있는 유령 맨션이 있다고 들었다. 알고 있나?」
「여기입니다. 누가 들어오는 게 싫어서 환각을 걸어놓았더니 어느 틈엔가 그렇게 불리더군요.」
지오토는 아주 잠시지만, 만악의 근원을 보는 눈으로 스페이드를 바라봤다. 이 도시에 떠도는 괴담 대부분이 그가 행한 진짜 일이라는 점에서 확실히 만악의 근원이다. 그는 지오토가 보내는 이걸 어쩌면 좋으냐는 듯한 눈길을 무시하고 한쪽 나무 의자에 앉혔다.
「별건 없지만, 구경이라도 하면서 있으십시오. 난 목욕할 물을 준비하겠습니다.」
「이것도 특별 서비스?」
「어떨까요?」
스페이드는 지친만큼 부드럽게 풀린 표정으로 웃었다. 술이 과하게 들어갔기 때문일까? 그는 이상할 정도로 자상했다. 지오토는 그렇게 느꼈고, 그걸 한마디로 줄여서 [신기하다]라고 생각했다. 상냥하기에 이상하다는 점이 그답다. 그리고 자신의 말을 지키는 점도 그다웠다. 피곤함에 자신의 가면이 벗겨진 줄도 모르고, 착실하게 욕실로 들어서는 스페이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는 슬며시 웃었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상태로 움직이기도, 뭔가를 만지기도 찜찜하다. [그럼 뭘 할까?]라고 고민하던 그는 책상 위의 오래된 책을 발견했다. 굉장히 애지중지 관리된 듯, 빛이 바랬을 뿐 그 이외의 손상은 없었다. 그는 가죽으로 된 표지를 조심조심 펼쳤다.
「이건 성경?」
무심코 내뱉은 그의 말을 들은 스페이드가 멀리서 대답했다.
「세계에 몇 개 없는 겁니다. 조심히 다루십시오.」
「이거 구텐베르크 성경이라도 되는 건가?」
「초판본입니다.」
그는 한 장 넘기려다가 급히 손을 멈추고 조심스레 표지를 닫았다. [진심이었다. 진짜인가?]라고 한참을 고민하던 지오토가 다시 표지를 넘겼다. 손으로 쓴 머리글자, 자세히 바라보니 종이에 소 그림이 있었다. 무쿠로는 그가 관찰하는 장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조금 놀랐다. 전에도 본 적 있는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무쿠로의 예상이 맞았는지 그는 아주 쉽게 진위를 가려냈다.
[진본!?]
“설마하니 뛰어난 감정사로 알려졌는데 그걸 못 알아봤겠습니까.”
무쿠로가 무심히 말을 받는다.
구텐베르크 성경, 초판본은 지금 알려진 바로 49권만 남아 있다. 그러니 이건 50번째, 알려지지 않은 책이다. 몸 하나로 살아가던 스페이드가 소유한 유일하고도 물질적인 자산이었다. 그가 돈이 떨어지면 팔 요량으로 보관하던 것이다. 사실상 죽을 때까지 팔 생각이 없었던 것이기도 했다. 그의 성격상 무일푼이 되기 전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돈을 구할 테니까.
그렇게 나름 소중히 보관했었으나, 정작 지오토의 생일날 마땅한 선물이 떠오르지 않아 넘긴 것이기도 했다. 그건 지오토의 요청으로 만든 둘만의 비밀 창고에 보관되어 있을 것이다. 봉골레의 본부 어딘가에 있는 비밀 창고는 그와 비등한 능력자가 아니면 찾을 수 없게 해놓았으니 그대로 남아 있으리라.
이제 돈 걱정은 없겠군요. 무쿠로가 속삭였다.
「도둑맞았다는 이야기를 들지 못했는데?」
「50번째입니다.」
「어떻게 네가 이런 걸 가진 거지?」
「필연적, 이라고 해두겠습니다. 갖고 싶습니까?」
「그래도 괜찮은 건가?」
「그것의 주인은 나입니다. 내가 허락하면 그걸로 끝입니다.」
스페이드가 욕실에서 나오면서 대답했다. 어쩐지 그게 이상하게도 씁쓸해 보였다. 지오토는 그걸 감지하고 자기가 한 말을 떠올렸다. 이상한 말이 있었나? 아니, 없었다. 그럼 왜? 그는 가만히 스페이드를 바라봤다. 여전히 어딘가 불편해 보였다. 그건 아마도 그의 과거와 이어져 있으리라.
무쿠로는 지오토가 내린 결론을 듣고 가볍게 웃었다. 역시 간단히 알아차렸네요. 너무 시시한 수수께끼지 않습니까? 그건 스페이드가 집을 나올 때 들고 나온 유일한 물건이다. 지오토도 끝까지 몰랐던, 그의 과거. 그게 이제야 무쿠로의 입을 빌려 그의 과거가 조금 밝혀진다.
“명망 높은 시칠리아 마피아에 어울리지 않던, 생물학적으로 내 아버지인 인간이 가장 아끼던 것이었다. 자기 아내가 미쳐서 죽든, 그 자식이 정적들에게 살해당하든, 전부 내버려두고 오로지 출세를 위해 움직이던 인간이 모든 걸 걸고 구했었다. 고위 간부가 되기 위해 준비한 장물이라고 했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간부에게 이걸 상납하기 전날, 나는 이걸 들고 출사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처형되었다고 하더군요.”
보상 심리 같은 거창한 이유로 저지른 짓이 아니다. 그저 가장 가치 있어 보이는 것을 들고 나온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결과를 예상하고 있던 시점에서 계획적인 범행이었던 것이다. 스페이드가 자기 손으로 죽이기 싫었을 정도로 최악인 아버지였다.
스페이드는 자신의 감정을 무시하고 장롱을 열어 주섬주섬 옷을 꺼냈다. 대중없는 사이즈의 옷 틈에서 지오토에게 맞을 법한 사이즈를 찾아 주섬주섬 꺼냈다. 군데군데 여자 옷도 보였다. 입기 위해 샀다고 보기 어려운 조합이었다.
「왜 그렇게 옷을 사놓은 거지?」
「글쎄요, 이렇게 사용하는 날이 올 것 같아서?」
「거짓말.」
「그 잘난 초직감을 속일 생각이십니까, 보스?」
「진담도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요.」
그가 선선히 긍정하며 지오토의 앞에 몇 벌의 옷을 보여준다. 그가 살짝 고개를 기울인다. 어느 쪽? 지오토가 가볍게 고개짓 했다. 가운데. 그는 지오토가 고른 것 하나를 남겨두고 나머지는 다시 장롱에 잘 챙겨 넣었다. 그리고 뜬금없이 책상에 딸린 서랍을 열어 옷을 꺼냈다. 서랍에는 한 번도 입은 적 없어 보이는 서너 벌의 옷이 잘 정리되어 들어 있었다. [어째서 장롱이 아니라 여기에?]라고 잠시 고민하던 지오토는 무심코 정답을 깨닫고 한숨을 내쉬었다.
「스피.」
「왜 그러십니까?」
「떠날 생각인가?」
그의 눈이 살짝 커졌다. 조금 허를 찔린 듯, 그는 가볍게 놀란 표정으로 살짝 웃는다. 설마하니 이런 걸로 알아차릴 거라 생각도 못했었거든요. 너무 무시한 것 같다고 무쿠로가 당시의 심정을 고한다.
지오토는 그의 반응에서 이맛살을 찌푸렸다. 자신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없게, 모호한 종류의 옷으로 장롱을 채우고 자신이 사용하는 진짜 옷은 서랍에 넣어뒀다. 떠낼 때 책상만 가져가면 되게, 혹은 책상만 처리하면 되게 해 놓은 것이다. 언제든지 떠날 수 있게, 최소한의 옷만 준비해 둔 것도 그 탓이겠지. [역시 아직도 진짜 가족이 되지 못했다.]라는 지오토의 상념이 어쩐지 무쿠로에게는 무겁게 다가왔다. 지금도 그는 이방인이었고, 그의 가족(Family)이 될 생각이 없었다. 그런 것 따위, 아직도 무엇인지 모르니까.
「역시 그렇게 입고 다니는 것도?」
「뭐…… 이렇게 정착할 예정이 없었습니다. 죽는다면 객사(客死)였을 테니 적어도 내가 누군지는 알게 하고 싶었습니다.」
「이곳에 살았었다는 흔적도 남기지 않았을 거면서?」
「버릇입니다. 난 이름에 걸맞은 형태가 될 예정이었으니까요.」
데몬(Demon), 신과 인간 중간에 있다는 Daimon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후대에 이교(異敎)의 신을 칭하는 말이 되었다. 어느 쪽이건, 실존과는 거리가 멀다. 이름에 걸맞은 형태, 존재가 아니라 형태라는 점에서 자신도 그 허무함을 안다는 걸 알려준다. 그는 지상에 닿지도, 하늘에 오르지도 못하는 존재였다. 해가 높이 떠오르면, 밤이 깊어지면 자연히 사라질 현상인 안개와도 같은 자.
지오토는 그가 닫았던 서랍을 다시 열어 뒤적였다.
「멀쩡한 옷이군.」
「그럼 어떠리라 생각한 겁니까?」
「그거, 그만 입고 다녀.」
「사생활에까지 관여하실 생각이십니까?」
「어, 스피는 ‘내 것’이니까.」
스페이드가 살짝 한숨을 내쉰다. 왜 또 골이 났느냐는 시선이 따가울 법도 하건만, 그는 무시했다. 그는 정말 그냥 스페이드를 붙잡고 싶었다. 땅으로 끌어내리고 싶었다. 그럴 수 없다면 하늘이 되어 품고 싶었다. 자기 곁에 실제로 존재하게 만들고 싶다. 그딴 것에 빼앗기고 싶지 않아. 그는 자신이 외면하던 것을 직시했다.
[그래, ‘내 것’이다. 절대 빼앗기지 않아.]
그게 어떤 마음인지도 모르면서, 넌 그저 함께 살아가기를 원했던 겁니까? 무쿠로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아까까지 하던 고민은 어느 틈엔가 사라졌다. 지금은 그냥 마음이 먹먹하다는 것밖에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웃기지도 않은 인연이다. 스페이드가 지오토와 함께 할 수 없으리라 여긴 날, 지오토는 그를 붙잡길 갈망하게 되었으니 처음부터 비틀린 셈이다. 어떻게 이럴 수 있었을까? 지오토, 대답해 줄 수 있습니까? 난 너만은 욕심내지 않기로 했습니다. 난 온건하게 소유하는 방법을 모르니까. 그런데 넌 나만을 갈망했었습니까? 단지 살아가게 하고 싶어서? 함께 살아가고 싶어서?
몰랐다,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 자신의 마음도, 지오토의 마음도. 어느 하나 아는 것이 없었다. 그의 기억을 속박하는 건 오로지 하나, 자기가 지오토를 죽였다는 것이 전부다. 그래서 도리어 더욱 용서할 수 없었다. 그의 마음이 깊고 따스해서, 그게 너무나도 소중해서 그걸 부숴버린 자신을 용납할 수 없다. 이 내가, 이런 너를 죽였다는 거지요. 네, 그랬던 겁니다. 저절로 탄식이 새어나온다.
「일단 젖은 옷을 벗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보스.」
「대답은?」
「벗기 어려울 테니 돕겠습니다.」
「스피.」
스페이드는 그저 빙긋 웃으며 왜 부르냐는 시선을 보낸다. 얄밉도록 변하지 않는다. 지오토의 눈이 그런 기분을 반영하며 가늘어졌다. 그러면서도 순순히 옷을 벗었다. 물에 젖어 축 늘어진 망토를 벗고, 양복도 주섬주섬 벗었다. 몸에 딱 맞는 정장이라 팔을 빼기 위해 여러모로 고생해야 했지만, 스페이드의 도움으로 우야 부야 벗을 수 있었다. 셔츠도 그렇게 간신히 벗었고, 그 위에 커다란 수건을 덮었다. 그 사이 스페이드는 사이즈가 맞는 가운이 있을 거라면서 주섬주섬 장롱을 뒤진다.
생각해보면 이 방에 들어오기 전까지 몹시 추웠는데, 지금은 조금 따뜻한 쪽이다. 그러나 어디에도 난방기구가 보이지 않았다.
「따뜻한데?」
「이 주위는 따뜻한 봄의 온도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환각으로?」
「돈으로, 입니다. 아무리 나라도 그렇게 힘을 쓰면 서 있지도 못합니다.」
「불가능이 아니라는 거군.」
그는 그냥 웃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리고 자신의 겉옷도 그제야 벗기 시작했다. 바닥에 흥건한 물기는 환각으로 소거시키면서 젖은 옷들을 한쪽에 담았다. 그런 그의 느릿한 행동을 바라보면서 지오토가 문득 기이한 말을 했다. 너무 뜬금없는 말이라 잘못 들었나 싶어서 스페이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참을 고민하던 그가 지오토를 돌아봤다.
「흐음?」
「그 머리 만져보고 싶다고.」
「술을 너무 마셨군요. 당연히 안 됩니다.」
단호한 목소리다. [하긴, 저 자존심에 허락할 리 없지.] 그래도 만져 보고 싶었다는 건 진심이었던지라 지오토는 굉장히 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표정을 지어도 허락하지 않습니다. 될 리가 있다고 봅니까? 인상만 쓰던 스페이드의 속내를 무쿠로가 까발렸다. 아주 쉽게 알 수 있건만 아쉬워하는 게 이상합니다.
어쨌든, 지오토는 목적을 바꿔 물었다.
「그럼, 진짜 이름은 뭐지?」
「데몬 스페이드입니다. 이상한 보스는 스피라고 부르지요.」
「어릴 때 이름은?」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명령이라도?」
「버린 걸 다시 주워담을 이유는 없습니다.」
무심한 어조였지만, 어쩐지 씁쓸하게 들려서 지오토는 캐묻지 않았다. 그래서 지오토는 물론이고 봉골레의 패밀리는 끝까지 그의 진짜 이름을 몰랐다. 사하퀴엘 로렌츠. 무쿠로가 오래전에 버렸던 것을 입에 담았다. 그 의미는 신의 창의성, 그래서인지 그는 어릴 때부터 환술에 뛰어났었다. 그때는 그래도 아버지에게 이용가치가 있어서 그럭저럭 대접을 받았었다. 다 옛날이야기지만.
「부모님은?」
「있긴 합니다.」
나도 인간이니까요. 장난스레 덧붙였지만,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니다. 그의 부모는 모두 죽었다. 반쯤 미쳤다가 병으로 죽은 어머니와 척살된 아버지는 추억거리도 못된다. 「형제는?」「비슷합니다.」역시 다 죽었다. 그 시체를 대부분 스페이드, 스스로 처리했었다. 행복했던 기억이 하나도 없던 형제들이라 이젠 진짜 이름도 가물가물했다. 참 하찮은 가족관계였군요. 무쿠로가 대신 한숨을 내쉬었다. 돌이켜보면 지금까지 정상적인 가족이었던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럼…….」
「호구조사입니까? 술을 너무 많이 마셨군요.」
그건 꽤 노골적이고도 단정적인 거부였다. 이야기할 거리가 없었기에 더 날카롭게 반응했었다. 지오토는 잠시 멈칫하다가 그게 화를 내는 게 아니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그래서 그냥 그런가, 라고 흘려버릴 따름이다. 그리고 더는 묻지 않았다. 그가 말하고 싶어 하지 않다고 느낀 탓이다. 앞서 계속 이야기했지만, 그 초직감은 사기입니다. 이젠 놀랍지도 않은 어투로 무쿠로가 덧붙인다.
[그냥, 알고 싶었을 뿐인데……. 네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떻게 자랐는지 알고 싶었다. 가까워지고 싶다. 하지만, 넌 아무것도 묻지 않겠지. 나에 대해 알려고도 하지 않을 테지. 지금까지 몰라도 불편함이 없었으니까.]
정답이라 따로 덧붙일 말도 없을 정도네요. 이런 건 그가 지오토에게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현재밖에 없는 인간이라 그랬던 것이다. 현재가 중요하지, 이미 지나간 과거는 몰라도 된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니 그는 현재의 지오토만 알면 그만이었다. 모른다고 해서 현재가 변할 리 없다고 여겼으니까. 이젠 아니라는 걸 알지만, 말입니다. 무쿠로는 슬쩍 웃었다.
그때까지 스페이드는 그때까지 어렵사리 옷을 벗고 있었다. 졸지에 할 일이 없어진 지오토는 슬쩍 책상의 서랍을 뒤적였다. 그러다 낯익은 상자를 발견하고 꺼내 들었다. 무감각하던 표정이 슬며시 일그러진다.
「스피~?」
「무슨 일입니까?」
「이거 내가 준 선물 맞지?」
「…… 그럴 겁니다.」
「뜯지도 않은 건가?」
「그렇게 되었습니다만……?」
이상할 정도로 살벌해진 지오토의 눈초리에 그는 어색하게 시선을 돌렸다. 그가 왜 화를 내는 지 이해하지 못한 탓이다. 그냥 누군가에게 순수한 호의로 선물을 받은 건 처음이었고, 설마하니 지오토가 주리라고는 생각도 못한 탓에 너무 소중해져서 그대로 둔 거다. 사정을 이야기하자면 그렇지만, 준 입장에서는 그냥 사줬더니 방치하고 있었던 것일 뿐이다. 덕분에 자기가 준 선물이 방치된 모습을 발견한 지오토는 살벌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봤다. 당연히 그런 쪽으로는 전혀 면역이 없었던 그는 영문을 몰라 그저 슬며시 욕실로 몸을 피했다.
[바보.]
“그러게요.”
무쿠로가 성의 없이 답하며 침대에 털썩 앉았다. 혹시나 해서 앉았건만, 역시나 딱딱하다. 이런 건 푹신해도 될 텐데요. 그는 가볍게 투덜거리며 지오토를 바라봤다. 지오토는 자기가 했던 포장 그대로 남아 있는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않는 지 한참을 노려보다가 기어코 자기가 뜯어버린다. 끈을 풀고, 포장지를 뜯고, 상자를 열어 고민 끝에 샀던 선물을 끄집어냈다. 스페이드의 머리카락과 그 눈동자 색을 닮은 감색의 실크 넥타이였다.
「스피~ 이러와.」
「오라면 가야 합니까?」
「응.」
「어째서요?」
「스피는 내 것이잖아.」
거기다 난 보스라고. 지오토는 무심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포커를 치는 게 아니었다, 라고 후회했었죠. 무쿠로는 벌러덩 침대 위에 늘어졌다. 이후에 벌어질 일을 안다. 알기 때문에 짜증이 났다. 자신을 향한 분노가, 그 어리석음이 너무 싫다. 널 만나는 게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만나버렸다. 만난 순간 전부 기억나 버려서 떠나지도 못하게 되었다. 차라리 행복한 기억만 갖고 있었다면, 그랬다면……. 후회는 언제나 어리석게 이어진다.
「무슨 일입니까?」
스페이드는 좀 더 가까이 오라는 지오토의 손짓에 한숨을 내쉬며 다가갔다. 무슨 일이냐고, 거듭 물으니, 그가 질 좋은 실크 넥타이를 스페이드의 목에 걸었다. 스페이드는 슬쩍 주위를 훑어보고 그 넥타이의 출처를 알았다. 뜯긴 포장이 조금 아쉽다는 생각에 그냥 웃어버렸다. 뜯을까 말까, 수차례 고민하다가 결국 말았었다. 그 후로도 틈틈이 꺼내봤었다. 안에 뭐가 들었을까, 라고 기대하면서 쓸데없이 만지작거리다가 다시 집어넣었었다.
그렇게 소중해서 가지고만 있던 선물은 결국, 선물을 준 사람의 손에 열렸다.
「이게 선물이었습니까?」
「어, 적어도 정장을 입히고 싶었거든. 머리 좀 숙여, 쓸데없이 커서 메기 어려워.」
「보스가 필요 이상 작은 겁니다.」
「졸라버린다.」
「그거 무섭군요.」
조금도 무섭지 않다는 표정으로 스페이드가 고개를 숙였다. [진짜 졸라 볼까?] 잠시지만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던 지오토는 곧 넥타이를 매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게 매어주는 건 처음이라 이래저래 실수를 많이 했지만, 스페이드는 그걸 그냥 지켜보기만 했다. 스스로 매는 법을 몰라서가 아니다. 그럼 왜? 답을 피하고 일부러 의문을 떠올렸었다. 그러기 전에 떨어져야 한다는 걸 잊었었죠. 그래, 잊어버렸다.
지오토는 문득 얌전히 고개를 숙인 그의 머리에 뻗었다. 무심코, 정말 별생각 없이 그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는다. 그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뭐 하는 겁니까?」
「어떤 구조인지 궁금해서…….」
그런데 만져도 모르겠다. 지오토는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한 태도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도 모르게 어떻게 된 구조인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네, 등의 말을 한다. 갑자기 불러서 뭘 하나 했더니……. 스페이드는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고개를 들었다. 그에 놀란 지오토가 급히 넥타이를 잡아당겼다. 지오토의 힘은 가늘어 보이는 몸에 비해 굉장히 강하다. 그런 힘에 잡아 당겨졌으니, 그 반동으로 스페이드의 고개가 확 숙여졌다. 그게 꽤 아팠는지 살짝 인상을 찌푸렸지만, 변함없이 섬세하고도 단정한 얼굴이다.
지오토는 그와 이렇게 가까이에서 얼굴을 마주한 적 없다. 그래서였을까? 아니면 그냥, 정말 단순한 충동이었을까? 지오토는 무심결에 새가 쪼듯, 날아갈 듯 가볍게 입을 맞췄다. 한 사람도 당한 사람도 그대로 굳었다. 나에게만 기행을 일삼는 보스라지만, 이거 뭡니까? 스페이드의 표정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이건 뭡니까?」
「…… 키스?」
그걸 몰라서 물었겠습니까? 당황한 건 알겠지만, 바보 같네요. 무쿠로는 몸을 굴리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이게 TV라면 그냥 꺼버렸을 텐데 말이죠. 보기 싫다, 라는 게 그의 심정이었다. 추억은 추억일 뿐이다. 돌아오지 않는 이상, 저기에 있는 주인공이 다시 자신이 될 수 없다. 추억은 아름답지만, 그만큼 보기 괴로웠다. 행복했기 때문에 화가 나는 거다. 잃어버렸으니까, 그리고 ‘저건’ 자신이…… 로쿠도 무쿠로가 아니니까. 기억은 마음일까? 기억이 있으면 마음도 따르는 걸까? 무쿠로는 눈을 감고, 귀를 막았다. 어리석은 자문(自問)에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감정이 자답(自答)한다. 그러니 너에게 묻겠습니다.
「“말을 바꾸죠, 무슨 의미입니까?”」
[그러게 무슨 의미였을까? 그냥, 정말 단지 하고 싶어서 했다. 나는 왜 그랬지? 아니, 알아. 그건 나답지 않은 감정이다.]
조금 혼란스러워하던 지오토는 금방 감정을 다잡았다. 외면하던 답을 직시했다.
「글쎄, 한 번 더 해보면 알겠는데?」
그는 짓궂게 웃으며 다시 메마른 입술을 찾았다. 동요된 감정 때문에 바싹 말랐던 입술은 그걸 피하지 않았다. 함께하고 싶다는 것과 같은 세계에 존재할 수 없다는 모순이 스페이드를 괴롭혔다. 너에게는 나보다 너처럼 하늘을 닮은 사람이 어울린다. 그는 자신이 비정상적인 존재라는 걸 잘 알았다. 그렇기에 거부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지오토를 놓고 싶지 않았다. 그는 결국 씁쓸하게 웃으며 「그렇습니까?」라고 작게 속삭였다.
[기뻐하는 게 아니다, 그렇다고 싫어하는 것도 아니다. 어째서 넌 이런 곳에서까지 모호한 거지?]
잡고 싶다, 잡아야 한다. 지오토는 그의 모순을 깨닫는 순간, 자신의 감정을 확인했다. 모든 것을 포용하던 대공이 단 하나를 갈망한다. 아니, 알고 있었으면서 지금까지 모르는 척했을 뿐이다. 그렇기에 지오토는 그를 처음부터 ‘안개’의 수호자로 만들었다. 안개는 아무리 자욱해도 하늘에 닿지 않는다. 하늘은 아무리 갈망해도 안개를 붙잡을 수 없다. 그건 해가 뜨면 사라질 환상이니까.
가질 수 없기에 갈망한다. 그건 확고한 소유욕이었다. 사람을 가질 수 있어? 나만의 것으로 만들 수 있어? 그래도 돼? 지오토는 그런 속내를 숨기지 않았다. 선연히 드러난 감정은 자연히 그의 입가에 담겼다. 무심하던 얼굴 가득 환한 웃음을 담는다. 그 스페이드가 홀려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할 정도로 아찔한 미소였다.
「데몬 스페이드, D. 스페이드, 데몬, D, 스페이드.」
언제나 모호하던 그의 심리에 지오토가 선뜻 접촉했다. 손으로 더듬듯 느긋하게 그의 이름을 부르며 천천히 감정을 흔들었다. 당황한 그가 다시 연막을 치기 전에 그의 진심을 그러쥔다. 그리고 그가 차마 이름 붙이지 못했던 감정이 완전히 형태를 잡고, 빼앗았다. 그걸 확인하듯 지오토가 속삭인다.
「스피, …… 나의 스피. 어느 쪽이 마음에 들지?」
나만의 스피. 지오토가 환하게 웃었다. 그의 직감에 의하면,
「…… 스피…… 로 하죠.」
스페이드도 그와 같은 마음.
“치사해요, 지오토.”
초직감으로 이미 답을 알고 있으면서 거절할 수 없는 말을 하다니 말이지요. 무쿠로는 숨죽여 웃었다. 기억은 너무 달콤해서 숨도 쉴 수 없게 한다. 그렇기에 더 괴롭다. 이 기억은 이제 어떤 의미입니까, 사와다 츠나요시. 네가 나에게 집착하는 건 단순히 그의 기억 때문입니까? 대답해줘, 아니 대답하지마. 흔들리는 마음을 누군가가 비웃는다. 벗어날 수 있다고 보는 거야? 라고 소곤거린다. 누가, 누구에게서? 대답하지 못할 질문을 자기에게 던지며 그는 몸을 움츠렸다. 시원하게 속마음을 털어놓고 싶다. 아무리 그래도 아직은 아냐, 아직은 안돼! 그는 이성을 브레이크로 삼아 폭주하는 마음을 다잡는다.
그런 그에게 지오토의 생각이 스며들었다.
[이상하군, 왜 아직도 멀게 느껴지지?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
“그야, 그런 부분에서는 완고하니까요.”
함께 할 수 없다고 절감했었으니까 쉽게 마음을 돌리지 못하는 거다. 그렇다고 외면하거나 모르는 척하지도 못한다. 떠난다는 건 진정으로 불가능했다. 처음부터 비틀린 존재였기에 애달픈 마음이 모순되는 것도 순식간이다. 그래서 스페이드는 그냥 웃었다. 자신이 너무 어리석어서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일단, 씻도록 하세요. 준비는 끝났으니 이제 들어가면 됩니다. 갈아입을 옷도 준비해 뒀으니 그 정도는 혼자 할 수 있겠지요?」
어린애를 달래는 말투다. 덕분에 지오토가 [날 놀리는 건가?]라는 생각을 할 정도로 기이한 태도였다. 분명히 서로 사랑한다고, 그걸 확신했건만 왜 이런 반응이야? 그의 이맛살이 슬며시 찌푸려졌다. [이걸 어쩔까?] 그는 잠시지만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러다 유쾌한 듯 웃는 스페이드에게 귀여운 척 마주 웃었다.
「스피도 같이 들어가자. 응?」
「뭐 하는 겁니까?」
「이걸 바라는 거 아니었나?」
「그렇게 해석될 수도 있군요. 앞으로는 유의하겠습니다.」
스페이드가 못 볼 걸 봤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젓는다. 그러면서 한걸음 물러나는 꼴이 얄밉다. 「이상한 짓은 네가 먼저 했잖아!」 지오토가 불만스럽게 넥타이를 잡아당겼다. 「그만 당기세요, 이게 무슨 조련용 목줄입니까?」 그렇게 저항하던 그는 넥타이가 끊어질 듯 팽팽히 당겨지자 항복했다. 소중한 선물이라, 망가뜨릴 수 없어서다.
지금은 어디에? 어디에도 없어, 그때 같이 다 타버렸잖아. 무쿠로는 무심코 자문자답하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어쩐지 멍한 표정으로 구석으로 걸어간다. 그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곤란합니다. 아니, 조금만 더……. 신음처럼 속삭이며 고개를 숙이고 주저앉았다. 그 순간, 그는 진짜 그곳에서 자신을 유리(遊離)시켰다.
「어쨌든, 같이 들어가자.」
「달갑지 않습니다만?」
「고집부리지마, 스피. 입술이 새파랗게 질렸어.」
지오토가 스페이드의 입술에 손을 가져갔다. 정작 스페이드는 곤란한 듯 인상을 쓰며 고개를 돌려 그 손길을 피했다. 감정적으로 둔한 사람이라 몸까지 피곤한 상황에서 과도하게 심력을 소모하니 피로가 중첩된다. 거기다 젖은 상태라 체온은 계속 빼앗기는 중이라 농담이 아니라 진짜 기절할 것 같았다. 오로지 이성의 힘으로 멀쩡한 척하는 중이니 감정에 휘말리는 순간 뻗는다. 그런 꼴사나운 모습을 보일 것 같습니까? 그는 속으로 이를 악물었다.
「보스가 이런 상태로 계속 있으면, 나도 이대로 있을 겁니다. 그게 싫으면 어서 들어가세요.」
「좋아, 그럼 안내하도록.」
좀 더 실랑이할 것 같았는데, 지오토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좁은 방안에 무슨 안내가 필요하나 싶지만, 하라면 해야지. 왜 그래야 하느냐고 따질 기력도 없어서, 스페이드는 느릿하게 앞장섰다. 실랑이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 기뻐서 발걸음도 어쩐지 가볍다. 그래서 ‘어째서’ 지오토가 쉽게 넘어갔는지 생각해보지 않았다. 피곤해서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서다. 그냥 감정이 흔들리는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어서다.
지오토가 슬쩍 웃는 얼굴로 그 뒤를 가볍게 따랐다.
「여기입…….」
그리고 스페이드는 오늘 두 번째 물에 빠졌다.
스페이드를 욕조에 던져 넣은 지오토가 생글생글 웃으면서 「신발은 벗어야지.」라며 그의 신발까지 벗겨줬다. 그는 진짜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는 데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분명히 그냥 안내만 하려고 했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요?」 멍하니 중얼거리는 모습이 신기해서 지오토는 한참 동안 숨죽여 웃었다. 「계획이었던 겁니까, 보스?」 그가 중얼중얼 생각나는 대로 내뱉는다. 어째 진짜 화난 것 같아서 그제야 지오토는 웃음을 멈췄다.
이윽고 정리가 끝났는지, 그가 이를 갈면서 뭔가 잘 들리지도 않는 목소리로 뭔가를 중얼거린다. 분명히 성격대로 꼬인 말이겠지만, 그게 뭔지 궁금하다. 지오토는 자기도 취향이 별나다고 생각하면서 몸을 기울였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스페이드가 그를 욕조 속으로 끌어당겼다. 지오토는 조금 허망하게 이게 목적이었나 보다, 라고 생각했다. 아직 조금 말랐던 옷이 다시 젖어서 아깝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게 다였다. 지오토의 목적은 일단 같이 씻는 거였으니까.
「옷 벗는 거 좀 도와줘.」
「너, 다른 사람에게 뻔뻔하다고 잘도 말하는군요. 양심은 어디에 갔다 버렸습니까?」
「자기 이야기를 남에게 하는 건 나쁜 행동이야, 스피.」
「지금 누구 이야기를 하는 겁니까?」
「스피.」
스페이드가 벌떡 몸을 일으키자, 그가 반사적으로 붙잡는다. 놔요. 성질 급하긴, 앉아. 싫습니다. 스피는 착한 아이지? 너 진짜 죽고 싶습니까? 스피~. 그러한 눈빛이 오간다. 아주 당연한 말이지만, 이 실랑이의 승리자는 지오토였다. 스페이드가 아무리 싫다고 발악해도 조금 풀이 죽은 기색의 그를 못 이긴다. 고작 기색인데, 고작 그래 보이는 수준인데! 스페이드가 속으로 자기에게 절규해 봐도 몸은 이미 그의 곁에 앉았다. 아, 젠장.
이러리라 예상한 건 지오토도 마찬가지였기에 아주 만족스러운 미소를 그렸다. 스페이드가 자신에게 약한 건 처음부터 알았으니까. 요는 그런 마음을 인정하기까지의 시간이다. 어째 다 낚였음에도 인정하지 않으려고 발악하는 것 같아서 재미있다고나 할까? 스페이드가 난리가 날 생각이었지만, 불행히도 그에게 독심술은 없었다. 단지 지오토가 너무 즐거워 보여서 기분 나쁘다며 인상을 찌푸릴 따름이다.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스스로 벗을 겁니까, 내가 벗겨 드릴까요?」
「과연 장소와 말하는 사람에 따라 같은 말이라도 다르게 들리는 거로군. 스피는 유난히 심하네.」
「확실히 그렇군요. 지오토, 도발도 대담한 것도 좋습니다만, 내일 못 일어나도 괜찮은 겁니까?」
「무슨 의미냐고 따져도 되는 걸까?」
「시작은 너였습니다. 그래서 어느 쪽입니까?」
「스피를 벗기는 쪽.」
어쩐지 장난기 어린 목소리다. 이건 확실히 반응이 궁금해서 한 말이리라. 그는 슬쩍 인상을 쓰다가 그냥 그 선택지를 무시하기로 했다. 오래 생각해봤자 피곤한 일이고, 실랑이를 해봤자 피곤한 일이고, 이대로 욕조에 있는 것도 피곤한 일이고……. 그는 어쩐지 생각이 하나로 귀결되는 것 같아서 잠시 머리를 흔들었다. 이성으로 다잡기 어려울 정도로 피곤한 것 같다. 피곤을 풀려면 휴식을 취해야 한다. 즉, 이 상황을 어떻게든 마무리 지어야 한다. 그가 그런 결론을 내리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렸고, 지오토가 「반응이 없네?」라면서 슬금슬금 그의 옷을 벗기고 있었다.
그는 순간 말문이 막혀서 지오토의 행동을 멍하니 지켜봤다. 그러다 내린 결론이,
「굉장히 서툴군요.」
「그야 처음이니까.」
「젖었다고는 해도 남자 옷입니다. 드레스를 벗기기보다 훨씬 쉽습니다. 드레스가 젖었다면 더 어렵죠.」
「스스로 벗어줘서 벗길 일이 없었어.」
「벗겨주길 원하는 쪽도 없었습니까?」
「스피는 많았었나?」
「꽤…… 잠깐, 넥타이는 목줄이 아닙니다. 그만 잡아당기세요. 조르지도 마세요! 왜 갑자기 화내는 겁니까?」
스페이드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해하지 못하는 티가 너무 나서 화내지도 못하겠다. 지오토는 속으로만 혀를 차며 설명해보라는 그의 눈빛을 무시했다. 정확하게는 머릿속이 복잡해서 설명할 생각도 못했다. 그는 일단, 겉만 보면 잘생기고 능력도 좋으니까 여러 사람이 꼬였을 수 있다. 어차피 그의 마음이 움직인 적 없었을 거니까 상관없지 않…… 은건 아니다. 그래, 아니다. 어쩐지 다시 화가 나는 것 같은데…… 왜 그는 이런 쪽에서만 둔한 걸까? 이해하지 못한다는 쪽이 맞으려나?
그는 깊은 생각에 잠겨 계속 넥타이를 잡아당기는 지오토의 팔을 막아야 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이러다 진짜 끊어집니다. 그만 당기세요!」 그제야 점점 손에 힘을 주던 지오토가 멈췄다. 이윽고 다시 작업을 재개한다.
「벗기기 어려우니까 어서 협조해.」
「하아……, 넥타이부터 풀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푸는 법, 잊어버렸……. 내가 묶어줬잖아. 마음대로 풀지마!」
그가 그렇게 외친 순간 스페이드가 지은 표정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지오토로 하여금 그의 머리를 후려치게 할 정도다. 모든 것을 포용하는 하늘이라도 수용하지 못하는 게 있기 마련이다. 덕분에 스페이드는 약 10초간 기절했다가 깨어났다. 그는 그대로 잠들지 않기 위해 울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억지로 정신을 차린다. 조금 미안해진 지오토가 자기가 때린 곳을 살살 문질러줬다. 병 주고 약 주는 겁니까? 그래도 스페이드는 아주 얌전히 그 손길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의 다른 손을 꼭 잡았다.
「이제 그냥 스스로 하겠습니다. 네 옷이나 벗어요.」
「조금만 하면 다 벗기니까 내가 하겠어.」
「속옷까지 벗겨줄 필요는 조금도 없으니까, 그쯤하고 너나 벗으세요. 아니면 벗겨 드릴까요?」
어쩐지 숙련가의 분위기가 난다. 하긴, 이 상태에서 벗는 건 어렵지. 지오토는 선선히 그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사족을 달자면 그는 정말 능숙했고, 몇 초 지나지 않아 지오토는 거의 알몸이 되었다.
「스피, 멈춰! 내가 벗길 때는 싫어했으면서 어째서 자연스럽게 속옷까지 벗기려고 하는 거지?」
「아, 실례했습니다. 늘 그러다 보니 보스라는 걸 잠시 잊었……. 왜 또 화내는 겁니까? 어째서?」
그는 이번에도 이해하지 못했다. 생각해보면 딱히 화낼 일은 아니다. 지오토도 육체적인 관계에 있는 여성도 있었으니까. 애초에 깨끗하게 지낼 수 없는 뒷세계다. 광기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관계다. 그건 지오토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저 그가 남녀 가리지 않고 익숙한 것 같아서 화가 난 거다. 어떻게 살았던 건지 반드시 물으리라. 명령해서라도 듣고 말 거다!
그는 뭔가 굳게 다짐하는 지오토를 멍하니 바라봤다. 그에게는 그 모든 게 그냥 투정으로 보였다. 화난 것 같긴 한데, 그냥 투정 같다니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는 그냥 넘어갔다. 피곤하니 머리가 잘 굴러가지 않은 탓이다. 어떻게든 달래서 빨리 끝내야겠다는 생각만이 오락가락한다. 「무조건 항복입니다. 뭐든 할 테니 이제 화를 푸세요.」 그에 지오토는 당당히 요구했다.
「스피, 눈이 따갑진 않아?」
「괜찮습니다만, 앞으로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로 화내지 않겠다는 것과 내 머리를 감기겠다는 걸 교환하다니, 손해인 거 아닙니까?」
「화내는 이유를 설명하겠다는 거니까, 딱히 손해는 아니지. 그건 그렇고 역시 구조를 모르겠군.」
「이건 화내도 되겠지요?」
그는 조용히 자신의 분노를 피력했다.
그 후에 잠시간의 침묵이 흐른 후, 그는 욕조에서 잠들어버린 지오토를 침대로 배달해야 했다. 물론 이상하게 조용해서 돌아보고 잠든 지오토를 발견한 뒤, 그가 지었던 표정은 그야말로 해탈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에게 그런 기분을 맛보게 할 수 있는 건 지오토 밖에 없으리라. 그는 그렇게 자기도 기절할 것 같은 상태로, 오로지 정신력 하나만으로 버텼다. 그는 그 근성으로 지오토에게 옷도 입혀주고, 침대에 잘 눕혀준 후, 따로 꺼내놨던 이불을 챙겼다. 그리고 침대 대신 사용할 수 있는 소파에 이불을 돌돌 말고 누웠다. 이제는 쉬어도 된다고 생각한 순간, 그는 그대로 기절했다.
그런데 이후의 내용의 분위기도 그렇고 해서 좀 잘랐습니다.
지오토가 알려주는 넥타이의 올바른 사용법입니다.
네, 저는 저게 올바른 사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틀려도 괜찮아![...]
추가할 말이 많았던 것 같은데 왜 기억이 안날까요?
순간기억상실증인가?
메모해두는 습관을 가져야 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진짜 같은 양이 더 있어야 이 편의 완결이지만, 너무 길어져서 잘라버렸습니다.
양조절하는 법 좀 누가 가르쳐 줬으면 좋겠네요.
그런데 편수 조절만이라도 하고자 그냥 붙였습니다.
이거 몇장인지 묻지 말아주세요, 저도 모르겠어요.
모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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