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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만 고양이 선원의 방/작은 서가

그늘이 드리운 혼마루[11]

by 깜냥이 2018. 6. 30.

오랜시간 뒤척이고 나서야 간신히 잠이들었건만 눈을 뜨고 단말기로 시간을 확인하니 어이없을 정도로 이른 아침이었다. 아니 수험생으로써 생각하면 그렇게까지 이른 시간은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뭔가 찜찜한 기분이 든다. 더 자고 싶어도 잠이 오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나 멍하니 앉아있노라니 창살에 비춰 들어오는 그림자의 형태가 이상했다.
뭔가 문 앞에 앉아 있는지 덩어리진 그림자에 문을 살며시 열어보니 야만바기리가 기둥에 기대어 앉은 채로 잠이 들어있었다. 저런 자세로 자면 불편할텐데 들어와서 자라고 해야하나 아니면 덮을 것이라도 줘야하나 고민하며 그에게 손을 뻗자, 기척에 놀랐는지 야만바기리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놀라서 커다래진 눈과 당황해서 붉어진 얼굴로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입을 벙긋거리다 후다닥 도망쳐버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모퉁이를 돌아서 사라졌던 야만바기리가 내 눈치를 살피려는 건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풉!"

"...!"


뭐야, 뭔데 귀여워. 큰 소리로 웃었다간 민망해진 그가 도망갈것 같아 입을 틀어막고 웃음을 참았다. 억지로 웃음을 억누르느라 자리에 털썩 주저앉던 찰나 뒤편에서 드르륵하고 장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웃음을 참는 것이 더 중요했던 터라 손으로 입을 있는대로 누르며 들썩이는 어께를 진정시키려 애를 썼다.


"주인! 괜찮은가? 어디가 아프기라도 한건가?"

"아... 흡."

"주인? 주인! 아니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츠루상? 무슨일이야?"


설상가상으로 내 모습을 보고 무슨 일이 생긴 것으로 착각한 과보호꾼 츠루마루에 의해 츠루마루 찰떡 둘이 방에서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주저앉아 웃음을 참으려 바들바들 떠는 내 모습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안절부절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미안하지만 웃음을 참고 있는거니까 그냥 자리를 비켜주지 않을래? 웃음을 참기도 힘든데 옆에서 소란을 피워대니 더 웃겨서 고통스러울 지경이다. 젠장 웃음으로 복근 단련하는 기분이야.


"주인!"

"푸흡... 큽..."

"...... 아?"


결국 참지 못해 새어나간 웃음소리에 소란스러웠던 츠루마루의 목소리가 멎었고 안절부절하던 이들의 행동도 멈췄다. 잠시 진정한 뒤, 고개를 들어보니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얼굴로 굳어있는 츠루마루와 저 멀리 점점 붉게 물들고 있는 토마토기리... 아니 야만바기리가 보였다. 곧 완전한 토마토가 된 야만바기리가 도주했고 나는 웃음을 참느라 배가 아프다고 츠루마루에게 호소했다가 별 이상한 것으로 걱정시킨다며 면박을 받았다.
내가 무사함을 확인하고 한숨을 내쉬는 쇼쿠다이키리와 오오쿠리카라에게 쓸데없이 걱정을 끼쳐서 미안하다하니, 그 둘은 말 못할 것을 씹은 표정을 하더니 도로 방으로 돌아갔다. 


"아침부터 놀랐다- 놀라움은 좋지만 이런 놀라움은 사양이야, 주인."

"크흠, 일부러는 아니었어."

"그야 그렇겠지. 이런 곳에서 웃음을 참느라 애쓰고 있을거라고 누가 생각했겠나."


사방이 적인 곳이다. 이런 곳에서 웃을 만한 일이 없는 것이 당연하건만 야만바기리 덕에 웃음이 터져서 참느라 봉변 아닌 봉변을 당했다. 여전히 주체 못하고 실실 웃고 있으니 츠루마루도 왠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다며 덩달아 키득거렸다.
그리고 말이 씨가 된다더니, 정오가 조금 지난 시간에 커다란 덩치에 승려복을 입은 이가 텐구 복장의 작은 아이를 데리고 나를 찾아왔다.
새로운 방문객은 이 곳에서 지금까지 만났던 이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나를 보자마자 호탕하게 웃어제낀 이와토오시라던가, 대뜸 아름다운 분이라는 낮간지러운 칭찬을 한 이마노츠루기라던가. 특히 이마노츠루기기가 활기찬 목소리로 외쳤을 때는 당황스럽고 부끄러워서 숨고 싶었다. 아름답다니 이건 무슨 소리야?


"영력이 마치 햇빛같이 따듯하고 무지개같이 아름다워요!"

"아, 영력이."

"주인, 당황했는가?"

"당황하지, 대뜸 저런 소리를 들으면 누구라도 그럴거야. 이래서 말에 주어가 중요한 거라고."


발랄한 이마노츠루기의 말에 안도하듯 중얼거리자 츠루마루가 짖궂은 얼굴을 했다. 투덜거리는 내게 귀가 붉어졌다며 놀리는 츠루마루는 무시하고 너덜거리는 둘을 수리실로 데려갔다. 도움패 덕에 순식간에 깔끔해진 모습으로 수리실을 나온 둘은 모두를 설득해 돌아오겠다며 돌아갔다. 그리고 그 말을 지킨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 인지 슬슬 날이 저물어가는 무렵 아키타와 고코타이가 찾아왔다. 둘을 기꺼이 수리실에 들여보내고 도움패를 꺼내들던 차에 단발머리 꼬마 둘을 데리고 주황색 머리의 아이가 찾아왔다. 복장을 보니 아와타구치다. 갑자기 이름이 헷갈려, 기억해내느라 느릿해진 움직임으로 도움패를 사용하니 수리실에서 나온 아키타가 그들을 보고 왜인지 반가운 얼굴을 했다.


"마에다! 히라노! 고토형이랑 올거였으면 다같이 올걸!"

"그러면 더 늦어졌을 걸? 이 녀석들, 야겐이랑 아츠시가 걱정된다고 성화여서 겨우 달래서 데려온거니까."

"에, 아직도 못 찾은거야?"

"대충 어디에 있는지는 알 것 같지만."

"잠깐, 찾다니? 야겐이랑 아츠시를?"


사이좋은 형제들을 그저 바라보며, 누가 마에다고 누가 히라노였던가를 생각하고 있던 찰나 귀에 거슬리는 대화 내용에 무심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 망할 꼬맹이 둘이 이번엔 가출이야? 아니 혼마루 밖으로 나간 것도 아니고 많은 건물들 중 어딘가에 있을테니 가출이라기엔 애매하다. 내 물음에 고토가 나와 눈을 마주보더니 말을 돌리듯 동생들을 부탁한다며 두 아이를 내게로 떠밀었다.
이미 들을 만큼 들은 것 같지만 그래도 모르는 척을 해 주겠다는 티를 내며 아이들을 수리실로 들여보냈다. 여전히 망설임 없이 써대고 있는 도움패를 보고 고토가 놀란 얼굴로 바라보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나온 아이들은 물리고 바로 이어서 놀란 꼬맹이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 




웬일로 수리실 앞이 붐비고 있다. 사니와와 단도들 여럿, 그리고 제 주인을 확인하러 왔다 갔다하는 츠루마루까지. 수리를 마쳤음에도 대화를 나누는지 떠날 생각을 않는 이들을 보며 야만바기리는 그들이 제 형제의 이야기를 하고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이와토오시의 말에 결국 방황을 선택한 두 단도가 형제들의 품을 떠난지 고작 하루가 지났을 뿐이지만, 워낙 서로간의 우애가 좋으니 걱정인 모양이다.
야만바기리는 회랑으로 발을 돌리며 지난 밤 보았던 장면을 떠올렸다. 깨끗한 하늘에 휘영청 떠있는 달, 그리고 하늘을 보며 걷다가 발견한 야겐. 그의 시선은 지붕 위에 올라서있는 야겐의 시선을 따라 내려가 마루에 앉아있는 사니와에게로 향했다.


"야만바기리냐? 왜 자꾸 주위를 맴돌기만하는거야? 잠도 안오고 심심한데 이야기나 하게 이리 오던가."


갑자기 들려온 사니와의 목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란 야만바기리가 무심코 그에게로 다가가려다가 멈췄다. 자신과 사니와의 거리는 제법 멀다. 아무리 기척에 예민하다 하더라도 야만바기리를 눈치 챘을리가 없으니, 분명 사니와가 느낀 기척은 그가 아니라 야겐일 것이다. 재빨리 시선을 지붕 위로 돌린 야만바기리의 눈에 야겐이 몸을 낮추며 자신의 기척을 죽이는 것이 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니와는 제 말을 이어나갔다.
야만버기리는 사니와가 자신을 위작이라 칭하는 말에 놀랐다가, 동료에 대한 이야기에 측은한 시선을 보냈다. 그리고 만나고 싶었다는 말에 어째서인지 기뻐서 어쩔 줄 몰라 뒤집어 쓴 면보를 끌어당겨 얼굴을 덮었다.

사니와가 말을 마치고 다시 하늘을 바라볼때 야만바기리는 야겐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친 야겐이 잠시 갈팡질팡하더니 곧 도망치듯 뒷 마당 쪽으로 가는 것을 확인하고 야만바기리도 자리를 떴다.

-그랬었는데, 어쩌다보니 그의 문 앞을 밤 새우고 날이 밝을 즈음 꾸벅꾸벅 졸다가 사니와에게 우스운 모습을 보였다.
아침의 일까지 회상해버린 야만바기리가 부끄러움에 얼굴을 가리다가 회랑의 문 옆 기둥에 머리를 박았다. 큰 소리에 놀라 달려나온 시시오가 주저앉아 머리를 감싼 야만바기리를 발견하고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야만바기리..."

"... 왜."

"뭐해?"

"아무것도 아니다."

"... 그래?"

"응."


야만바기리의 뻔뻔한 대답에 그럼 앉아있지 말고 들어오라며 시시오가 그를 일으켜 주었고 야만바기리는 그의 손길을 따라 순순이 일어나 그의 손에 이끌려 회랑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어김없이 돌아온 이를 확인하는 미카즈키의 시선에 꾸벅 인사한 뒤 한 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회랑을 훑었다. 야겐을 찾아 나섰을 아와타구치 단도 몇이 자리에 없고 수리실 앞에 있던 이들 또 한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하세베...가 없군."

"아- 그 둘 찾는다고 나갔어."

"그런가."

"하세베 은근 걱정 많은 성격이니까-"


되도록이면 외출을 삼가던 이가 보이지않아 무심코 중얼거린 야만바기리의 말에 시시오가 느긋한 목소리로 답해주었다. 지난 밤에 야겐이 향했던 방향을 떠올리며 하세베에게 일러주러 가야하나 고민하던 야만바기리는 곧 고개를 내저었다. 그 둘이 이 혼마루 안에서 도망쳐봐야 뻔한데다 어제 그 뻔한 방향으로 간 것을 확인했으니 그가 알아서 찾아오겠지.




아이들의 설명이 끝나고 나는 가만히 손을 들어 얼굴을 덮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형제 때문에... 미안."

"아니, 네가 사과할 일은 아니니까. 그리고 이런 상황이니 이해는 해."

"음..."

"그럼 너희들은 돌아갈건가? 아니면 근처에?"

"남은 형제가 더 있으니 돌아가볼게."


눈치를 살피던 고토가 내 대답에 무언가 생각하는 듯 눈동자를 이리 저리 굴린다. 아무래도 눈치를 보는 기색이 강해 말을 돌릴 겸 거처에 대해 물으니 그에 대한 답은 금방 나왔다. 하긴 아와타구치의 인원이 워낙 많아야지, 도주 중인 녀석도 있는데 치료를 받는다면서 남은 인원까지 분열되면 좋지 않다.
일단 돌아가는 아이들을 배웅하고 그들이 모퉁이를 돌아 보이지 않게 된 뒤, 쌓아둔 화를 냅다 표출했다.


"이, 망할 꼬맹이들!"


찾으면 한 대씩 쥐어박아줄거다. 망할 녀석들! 갑자기 소리지른 나를 보며 츠루마루가 눈을 동그랗게 떴고, 나는 그에게 탈주범을 잡아오겠다 선언하며 겉옷을 챙겨 일단 밖으로 뛰쳐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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