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구절절하게 잡다한 이야기를 쓰려했지만, 그냥 포기했습니다.
노래 분위기랑 심하게 다릅니다.
가사는 일단 다 나오기는 합니다만, 연관성은 별로 없어 보입니다.
진짜 그냥 창작으로 넘길까 고민했었더랬죠.
BGM으로 원곡을 깔고 싶었지만, 느려서 포기했습니다.
이 아이들의 성격은 제가 생각하는 것과 많이 다릅니다.
모쪼록 유념해주세요.
炉心融解
(노심융해)
나는 고아다. 그것도 혼혈임이 분명한 금발 벽안의 고아다. 난 태어나자마자 이름도 받지 못하고 보육원에 버려졌었다. 난 그 이야기를 듣고 ‘요즘 세상에도 그렇게 고전적인 방법으로 애를 버리는 사람이 있었네.’라고 조금 태평스럽게 생각했었다. 그렇게 버려지긴 했어도 좋은 원장님 밑에서 그 녀석과 함께 나름 행복하게 자랐으니까. 나는 그랬지만, 원장님은 내가 충격을 받았다고 생각했었는지 말을 바꿔서 그 녀석의 이야기를 했었다. 그 녀석은 내가 발견되고 3일 후에 같은 장소에 버려져 있었다며, 똑같은 금발 벽안에 얼굴까지 닮고 우렁찬 목소리까지 닮아서 카가미네(鏡音)라고 성을 지었다고 하셨다. 그럼 이름은 뭐로 할까 고민하다가 외국인이고 하니 영어로 오른쪽(Right), 왼쪽(Left)에서 린(Rin)과 렌(Len)으로 지었다면서 웃으셨다. 내가 왼쪽에 있었다면 렌이 되었겠네요. 급조된 게 확실한 이름의 유래가 마음에 들지 않아 심통하게 말했더니, 원장님은 유쾌하게 웃으면서 「그랬다면 린(Lin)이고 렌(Ren)이지.」라고 하셨다.
그때가 14살 때다. 녀석은 아직 우리가 쌍둥이라고 알던 때다. 그래,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까지 나도 그 녀석도 멍청했었다. 이란성이건 일란성이건 쌍둥이의 혈액형이 다를 리 없는데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다니……. 나는 AB형, 그 녀석은 O형. 쌍둥이라면 될 수 없는 혈액형이다. 형제는 간신히 될 수 있었을까? 3일 정도 차이 나는 형제? 그건 웃긴 이야기잖아. 나와 그 녀석은 형제가 아니었다. 가족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머릿속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곧 안도했다. 어차피 가족이 아니라고 해서 하루아침에 그 녀석이 사라질 리 없잖아. 난 그렇게 안도했고 안심했었다.
멍하니 창밖을 보고 있자니 네온사인의 빛이 눈을 찔렀다. 밤이라 해도 눈부시구나. 방안이 어두워서인지는 몰라도 오늘따라 유난히 밝아서 눈이 따가웠다. 이상하게도 몸이 차갑게 식어버린 느낌이다. 마취라도 된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몸이 천근처럼 무겁다.
한참을 그러고 있는데 문득 목이 탔다. 시계를 보니 벌써 오전 2시다. 6시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았으니 목이 탈만도 하지. 굳어 있던 몸을 억지로 일으켜 냉장고에서 캔 맥주를 꺼내 들었다. 내일도 7시에 일어나야 하건만 잠이 오지 않았다. 다시 시계를 본다. 아직 정각 2시였다. 고개를 돌려 문을 바라봤다. 여전히 굳게 잠겨 있다. 올 사람도 없다. 그런데도 난 누굴 기다리는 거지? 그래, 올 사람은 없다. 그 녀석도 이젠 없다. 내 곁에 없다.
캔을 땄다. 차가운 맥주를 마시고 나니 멍하던 머리가 조금 정리되는 기분이다. 담배를 어디다 뒀더라? 구석에 던져둔 담배를 찾아 입에 물고 라이터를 켰다. 그런데 이게 치직거리는 소리만 나고 불꽃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필이면 이때 기름이 떨어진 거야? 짜증이 왈칵 치밀어 올랐다. 수제라서 쓸데없이 비싼 라이터 주제에 기름까지 빨리 닳는다. 분명히 이주일 전에 그 녀석이 기름을 넣어줬건만 그새 바닥이다.
이 라이터도 그 녀석이 줬다. 내가 담배를 입에 물면 기겁하면서 피지 말라고 난리 치던 놈이 생일날 선물이랍시고 이걸 줬다.
「담배를 끊으면 좋지만, 안 끊을 거지? 하여튼 몸에 안 좋은 것만 골라서 한다니까. 내가 네 고집을 어떻게 이겨? 여자애가 아무거나 들고 다니지 말고 그거 가지고 다녀. 너 닮아서 산 거니까 팔아먹거나 버리지 말고, 신경질 난다고 던지지도 말고. 알았지?」
라이터에 그려진 노란색 장미가 그렇게도 날 닮았다는 거냐? 그때는 그렇게 투덜거렸었다. 그리고 가격도 궁금했었다. 아무리 봐도 우리 형편에 어울리는 물건이 아니다. 녀석은 끝까지 대답하지 않았었고, 난 슬쩍 전당포로 가서 물어봤었다. 중고라고 해도 약 70만. 실용성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으려 해도 찾아볼 수 없던 라이터는 그렇게나 비쌌다. 미친놈, 이걸 무슨 정신으로 선물이랍시고 준 걸까?
어차피 이거 던져도 뭐라고 할 사람도 없는데 그냥 콱 던져버릴까? 그렇게 생각하며 잠시 라이터를 노려봤다. 하아, 보고 있자니 이걸 주면서 시원하게 웃던 녀석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만둘까? 라고 생각하기가 무섭게 화가 치밀어 올랐다. 웃는 얼굴이 떠오르면 뭐하지? 이젠 없는데? 결국, 던져버렸다. 자자. 바보짓도 이쯤 하자. 속이 타는 듯이 뜨겁다. 하아, 이런 곳 하나하나에 스트레스받으면 살아가기 힘들다. 난 그렇게 날 다독였다.
힘겹게 몸을 움직여 방에 들어갔더니 아침노을이 방안에 스며들고 있었다. 하? 이건 또 뭐람?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어? 어처구니없어서 시계를 봤더니 벌써 6시였다. 밤을 새웠다는 걸 자각해서인지 머리가 지끈거려왔다. 난 휴대폰을 찾아서 전원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하루쯤은 정말 일하기 싫은 날도 있는 거다. 자자. 자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한참을 누워 있었다. 몸도 머리도 마음도 무거웠지만, 정작 잠들지 못했다. 아무도 오지 않을 거다. 이젠 올 사람도 없잖아. 그런데도 마음 어딘 가에서는 거짓말이라고 속삭이고 있다. 그 녀석이 곧 배고프다면서 돌아올 거야. 그럼 난 한심하다는 듯이 일어나서 밥을 차려주겠지? 녀석은 미안한 듯 기쁜 듯 웃고? 그래, 그런 일상이 계속 되었다면 정말로 좋았을 텐데 말이야. 왜 그게 사실이 아니지? 잠들기가 너무 어렵다.
* * *
멍하니 몸을 일으켰다. 시계를 보니 벌써 오후 6시다. 모르긴 해도 10시간은 족히 잔 것 같다. 그렇게 오래 잤으면 몸이라도 좀 풀릴 것이지 오히려 더 굳어서 어깨가 무거웠다.
꿈을 꿨었다. 어린 날의 내가 그 녀석과 놀고 있었다. 천진난만하게 웃는 얼굴에 짜증이 치밀어 올랐었다. ‘죽일까?’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왜 그렇게 짜증이 났을까? 빛이 쏟아지던 오후 2시. 처음으로 녀석이 내게 노래를 불러주었던 날. 영원히 함께 있자고 했던 날. 그리고 거짓이 되어버린 날의 기억이다. 이상하지? 그 녀석보다 곁에서 웃는 내가 더 미웠다. 그래서 꿈속의 나는 어릴 적의 내 목을 노려봤다. 가늘게 떨리며 까르르 웃는 목을 조를까 말까, 정말 쓸데없이 진지하게 고민했었다. 그리고 울고 싶었다. 그런 심정으로 난 어린 날 보고 있었다.
이상한 꿈이었다. 녀석이 없으니 이젠 별별 꿈을 다 꾸는구나. 난 한숨을 쉬며 휴대폰을 찾았다. 분명히 구석으로 집어던졌을 건데 보이지 않았다. 아, 젠장. 되는 일도 없지. 넓지도 않은 방안을 뒤적거리다가 포기하고 주저앉았다. 챙겨둔 담배를 입에 물고 라이터에 불을 켰다. 아차, 기름이 떨어졌지? 결국, 다시 라이터를 집어던졌다.
“핵융합로에라도 뛰어들어버릴까.”
울적하면 입에서 튀어나오던 말이 나왔다. 담배가 없으니 더 우울하긴 해.
처음 이 말을 했을 때, 녀석이 그 파란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면서 「그거 위험한 거 아냐?」라고 했었다. 단순히 위험하기만 하겠냐? 내부 온도는 낮아도 5,000℃라네. 태평스레 그렇게 대답했더니 녀석이 기겁하면서 왜!? 라고 외쳤다.
「거기 들어가면 뼈는 남길 수 있는 거야?! 아니, 그전에 왜 그렇게 무서운 생각을 하는 건데!?」
녀석이 그렇게 질색하며 화내는 건 처음 봤었다. 파란 눈동자가 반짝반짝…… 우습게도 그게 예쁘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안은 새파랗게 반짝인다더라고. 분명히 예쁘겠지?」라고 말해버렸다. 안이 새파란 빛이라는 건 사실이었지만, 사실 파란색을 딱히 좋아하는 건 아니었는데 말이다. 그에 녀석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절절히 짓더니, 곧 피식 웃으며 「파란색이 좋아?」라고 물었다. 살짝 웃는 파란 눈동자가 좋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 저 눈동자가 예뻐서 그런 게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은 듯 입에서 저절로 말이 튀어나왔었다.
「핵융합로는 원통형이거든? 들어가면 파란빛에 에워싸이는 거야. 분명히 멋지겠지?」
「제발, 생각만으로 참아주라.」
녀석이 허탈하게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었었다. 어린애 취급하는 거 같아서 싫다고 했었는데…… 그날은 딱히 싫지 않았다. 파란 눈동자가 상냥하게 웃어줬으니까, 그러니 괜찮았다.
“정말…… 뛰어들어버릴까?”
그럼 죽는 것조차 모르고 죽어버리겠지. 재도 남기기 어렵겠지? 그럼…… 모든 것을 용서할지도 모른다. 나도 그 녀석도 용서될지 몰라. 한순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면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넌 어때? 그때처럼 화내면서 말릴래? 있지도 않는 놈에게 괜히 물어봤다. 아, 젠장. 또 조금 울고 싶어진다.
-퉁, 퉁, 퉁.
베란다 저편에서 누군가 계단 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무심코 밖을 바라봤더니 회색 구름이 붉은 노을 사이를 춤추듯 흐르고 있었다. 그렇게 흐려진 하늘이 유리창을 넘어 방 안에 스며드는 것 같다. 우울해지면 별생각을 다 하게 된다. 이상하지? 세상이 너무 흐려. 노을이 점점 짙어진다. 구름이 잠식하는 붉은빛. 아, 아니구나. 내가 언제부터인가 울고 있었다.
“눈물이 볼록렌즈의 역할을 해서 태양이 더 커 보이는 거야. 붉은색이 더 넓어 보이는 거야.”
아무도 없는 방안에서 혼자 그렇게 중얼거렸다. 세상이 그렇게 조금씩 죽어간다. 되는 일도 없고 너무 우울해서 「이 눈물에 녹아 나의 세상이 조금씩 죽어가고 있어.」라고 그 어느 날 나는 녀석에게 말했었다. 녀석은 말없이 그런 날 안아줬었다. …… 난 결국 눈을 감았다. 눈꺼풀 너머로 붉은빛이 스며들어온다. 눈이 따갑다.
잠깐 설 잠이 들었었다. 난 어린 나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녀석 곁에서 잠든 모습에 화가 났다. 14살의 봄. 바람에 흔들리는 커튼 아래에서 녀석이 연주하는 자장가를 들으며 잠든 척 녀석의 다리를 베고 있었다. 그런 내가 그때 녀석에게 말하지 못했던 말을 했다. 긴장해서 메마른 입술, 움직일 때마다 조금씩 갈라진다. 내가 한 말은 거품처럼 흩어져 녀석에게 닿지 않았다. 하지만, 녀석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렸다는 듯이 기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나도 행복하게 웃으면서 녀석의 곁에 누워 잠이 들었다. 이건 거짓이다. 난 끝끝내 아무런 말도 못했었다. 연주를 하던 녀석이 내가 잔다고 생각한 건지 이마에 키스하고는 슬쩍 곁에 누워 잠들 때까지 끝내 말하지 못했었다. 그저 잠든 녀석을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었다. 그래서 화가 난 거다. 이런 추억조차 거짓으로 덧칠할 정도로 미련하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거다. 그래 그런 거야.
“핵융합로에 뛰어들고 싶어.”
눈도 뜨지 않고 그렇게 말했다.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몇 달 전에 녀석에게 미인을 소개받았었다. 이름은 루카라고 했었지? 당당하고 차가운 느낌의 미인이었다. 하지만, 녀석을 보고 웃을 때면 분위기가 많이 풀려 털털한 이웃집 언니 같았다. 둘이서 각자 필요한 물건을 사러 나왔을 때 우연히 만난 거였다. 둘은 많이 친한 것 같았다. 서로 스스럼없이 대하는 게 사실 조금 부러웠고, 조금 신경 쓰였다. 녀석이 그때 내게 비밀을 만들었기에 더 그랬었다.
쌍둥이처럼 같이 자랐다. 떨어져서 살아가는 게 이상할 정도로 녀석과는 함께였다. 보육원을 나와서도 함께였다. 녀석은 그런 가족이었지만, 내게 비밀을 만들었다. 난 그 점이 싫었다. 그때는 이유를 몰라 그냥 녀석에게 심통만 부렸었다. 그때 함께 나간 것도 짜증만 냈던 게 미안해서였다. 「형제라도 데이트는 할 수 있잖아.」라고 내가 먼저 청했었다. 그전에 ‘녀석이 살 게 있다고 말했었으니까…….’라는 핑계도 있었다. 녀석이 기뻐했기에 참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사실 나도 조금 들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낯선 미인은 달갑지 않았다. 특히나 녀석과 친근해 보여서 더 거슬렸다. 그러다 녀석이 살려고 한 것을 찾았다면서 자리를 비웠다. 덕분에 나와 그녀는 서먹서먹하게 서로 바라봤었다. 그녀가 잠시 어색하게 웃다가 내게 살짝 속삭였다.
「쌍둥이…… 라고 하셨죠? 저 사실 렌을 좋아해요. 잘 되게 도와주실래요?」
난 왜 그때 고개를 끄덕였을까? 무심코 알았다고 중얼거렸었다. 조금도 그럴 생각이 없었는데……. 그날 어떻게 집에 돌아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녀석이 내게 「괜찮아? 혹시 루카에게 무슨 말을 들은 거야?」라며 물었을 때도 아니라고 대답했었다. 녀석이 어색하게 웃으면서 「저기 진짜 아무 말도 들은 거 아니지?」라고 다시 물었다. 순간 너도 그녀를 좋아하는 거냐고 화낼 뻔했지만, 간신히 참았다. 대신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고 했다. 녀석이 조금 섭섭하고도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그녀를 좋아하는 걸까? 하지만, 난 끝내 못 물었다.
그때 그냥 멱살을 잡고 무슨 말이냐고 화내면서 물어볼 걸……. 난 무서워서 아무 말도 안 했다. 녀석이 그 좋아하던 바이올린도 그만두고 날 위해 굳은 일도 마다하지 않았는데, 난 녀석이 비밀이 있다는 것에…… 고작 그 작은 것에 배신감을 느끼곤 입을 닫고 짜증만 냈었다.
난 사실 음악을 좋아했다. 그건 녀석도 같았다. 어릴 때는 원장님이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구해주셔서 함께 연주하곤 했다. 난 평범한 수준이었지만, 녀석에게는 제법 재능이 있었다. 유명한 콩쿠르에서 상도 몇 개 받았을 정도다. 내가 음악을 그만둔 것에는 그런 실질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사실 녀석이 연주할 때면 즐거운 듯 웃는 걸 보는 게 좋아서다. 좀 더 좋은 악기를 사주고 싶었다. 그래서 좋아하지도 않는 공부에 집중했었다. 돈을 벌어서 녀석에게 선물해야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정작 그 녀석은 날 대학에 보내겠다며 대뜸 그렇게 아끼던 바이올린을 팔아버리고 공장에 들어갔었다.
공부를 좋아하지 않았어. 좋아하지도 않는 것을 하면 네가 싫어하니까 좋아하는 척했을 뿐이야! 하지만, 이미 팔아먹은 건 어쩔 수 없지. 내가 열심히 해서 녀석에게 음악을 돌려주자. 난 그렇게 생각했었다. 피는 이어지지 않았지만, 가족이니 분명히 알아주겠지? 한없이 이기적인 나. 녀석에게는 가족이라도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고 했었다. 멋대로 생각하고 결정했으면서, 사실은 녀석을 조금도 믿지 않아 배신당했다고 느꼈다. 나지만 정말 징그럽게 이기적이다. 이딴 걸 그 녀석은 그렇게나 아꼈었지.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간다. 추억이 멋대로 표백되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해간다. 마치 그게 미련이라는 것처럼 어처구니없는 꿈을 꾼다. 웃기지도 않아. 지금 내 꼴은 너무 한심하다. 한숨처럼 진심이 새어나왔다.
“핵융합로에 뛰어들어 죽어버리면…….”
전처럼 편하게 잠들 수 있을 거 같았다.
* * *
-째깍, 째깍
흐릿한 의식 속에 시계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방안에 가라앉은 적막에 무심코 TV를 켰다. 오락프로인가? 사회자가 웃기지도 않은 농담을 했다. 그랬더니 카메라에 비치지 않는 방청객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TV를 끄고 리모컨을 집어던졌다.
윙하는 이명(耳鳴)이 일었다.
그날처럼 이명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때도 녀석을 기다리고 있었다. 뭔가 조금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는 걸, 혹시나 그녀와 관련된 일인 것 같아서 피했었다. 그때마다 녀석은 「알았어. 뭐, 시간은 많으니까…….」라며 넘어갔었다. 그것도 벌써 7번.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지만, 끈덕지게 말하려고 해서 일부러 기다렸다. 사실 마음을 다잡는데 그만큼의 시간이 걸렸었다. 그러다 오전 2시가 되었다. 이상할 정도로 늦다고 생각했는데 전화가 왔었다.
병원, 응급실, 위급.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엉겁결에 병원으로 가고, 원장님을 만났다. 원장님의 손은 새빨간 피투성이였다. 그리고 그 앞에 붉게 물드는 하얀 천을 뒤집어쓴 녀석이 있었다. 아니, 그게 녀석이라고 했다. 이게 무슨 농담인 걸까?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천을 벗기려고 했지만, 원장님이 말렸다. 보지 말라고, 자기 때문에 저렇게 되었다면서 내게 계속 미안하다고 했다. 왜 내게 미안하다는 걸까? 난 그저 녀석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말리는 원장님을 진정시키고 들춘 하얀 천 밑에는 조금 창백한 안색의 녀석이 있었다. 무심코 손을 뻗었다가 흠칫 놀랐다. 언제나 따뜻하던 녀석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점점 더 차가워지고 있었다. 교통사고라고 했다. 원장님을 구하다가 대신 치여 버렸다고 한다. 역시 멍청한 놈. 다른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부터 지독한 이명이 일었다.
그 후, 무슨 말을 들었는지, 무슨 말을 했는지, 어떻게 된 건지 조금도 기억나지 않는다. 이명이 사라지고 온전히 정신을 차린 건 녀석이 한 줌의 재가 된 후였다.
원장님이 내게 다시 미안하다고 했다. 난 그때 녀석이 든 보험의 수취인으로 엄청난 액수의 보험금을 받았다. 그걸 어떻게 쓰나 고민하고 있던 터라 그냥 괜찮다고 했었다. 그랬더니 원장님이 내 안색이 말이 아니라면서, 이젠 어떻게 할 것인지 물었다. 그냥 평소대로 살지 않을까요? 그렇게 대답하려고 했었다.
「약혼자가 죽어서 어쩐다니, 정말 미안하다. 정말 미안해.」
무슨 말인지, 이번에도 이해하지 못했다.
「어머, 설마……. 렌에게 아무런 말도 못 들었던 거니?」
뭘요? 무슨 말이요?
「어떻게 된 일이니? 렌은 분명히 네게 청혼할 거라고 했단다. 15살 때 너와 가족이 아니라는 걸 알고는 내게 그랬었어. 너희가 독립할 때도 그랬단다. 아니라면 내가 너와 렌이 함께 독립하겠다는 걸 허락했을 리 없잖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원장님은 대강 끼워 맞춰 이름 짓는 센스와는 달리 뜻밖에도 원리원칙주의자였다. 아무리 친하게 지내더라도 결혼을 약속하지 않은 이상 함께 독립하도록 허락한 적이 없었다. 난 우리가 쌍둥이라서 허락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쌍둥이가 아니라는 걸 원장님은 확실히 알고 있다. 어라? 생각의 꼬리가 비틀려 정리되지 않았다. 어떻게 원장님을 배웅했었는지 기억나지도 않았다. 언제나 애 취급을 했었잖아. 언제나 가족이상의 취급을 하지 않았었잖아. 그런데 이게 뭐야? 어지러웠다.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기분이었다.
그녀도 찾아왔다. 그녀는 원장님과 같은 말을 했다. 처음에는 조금 관심이 있어서 접근한 적이 있지만, 지금은 전혀 아니라고 말했다. 그 녀석은 조금도 돌아보지 않고 오로지 나만을 바라봤다면서, 그런 사랑을 받는 게 부러운데 정작 내가 그런 걸 조금도 모르는 것 같아서 심술부렸다며 미안하다고 했다. 이번에도 무슨 말인지 확실하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가 멍하니 있자, 그녀가 사실 녀석이 내게 청혼 준비하는 것을 도왔다고 말했다. 그녀는 일이 이렇게 되어서 안타깝다면서 내게 힘내라고 하고는 돌아갔다. ……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나만 모르고 있었어? 머리도 마음도 복잡했다. 정리되지 않았다.
심기일전으로 방을 치웠다. 이젠 혼자 살게 되었으니 쓸모없는 것들을 치워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녀석의 짐을 정리했다. 생각해보면 가구도 함께 고른 거였다. 그때 어쩌다 침대를 하나밖에 사지 않아 녀석은 바닥에서 잤다. 가끔 뭐 어떠냐면서 같이 자자고 했을 때, 녀석은 나이를 생각하자면서 그냥 바닥에서 잤었다. 가끔 자는 녀석의 품에 파고들어 자기도 했다. 기겁하며 물러서던 녀석을 보던 것도 일종의 재미였다. 그때가 떠올라 피식 웃으며 천천히 돌아보니 집에는 온통 세트거나 함께 고른 물건밖에 없었다. 커플 머그컵, 커플 룩, 같이 고민해서 산 장신구, 내가 조르고 졸라서 산 티세트, 난 어울린다고 했지만 정작 녀석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모자. 내가 쓴 걸 보고 싶다고 하면 그날은 종일 쓰고 있어줬다.
아, 유일하게 같이 고르지 않았던 물건은 책장에 꽂힌 책이었다. 작곡과 연주기법, 악보들, 녀석이 음악을 포기하고 바로 버렸던 것들이다. 그걸 내가 주워서 다시 꽂아뒀다. 그에 다시 버리려던 걸 내가 말렸었다. 언제고 난 녀석에게 다시 음악을 돌려줄 생각이었으니까 다 버리면 곤란했다. 나의 결사반대에 녀석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그냥 뒀지만, 다시 저 책들을 읽지 않았다. 그저 가끔 그립다는 표정으로 책장을 봤었다. 그럴 때면 내가 억지로 보게 했었다. 이래저래 아는 사람에게 악기도 빌려서 연주하게 했었다. 녀석은 그런 내 행동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언제나 멋진 연주를 들려줬었다. 난 책들을 쓰다듬다 결국 손을 뗐다. 이건 절대 버릴 수 없다.
결국, 목표는 줄어 마지막 옷장을 열었다. 옷은 남자 옷이니 입을 수 없겠다 싶어서 대강 꺼내서 상자에 차곡차곡 담았다. 어차피 못 입는 거니까 그냥 버리자. 그런 마음으로 상자를 들었지만, 결국 그냥 창고에 넣어두기로 했다. 어쩐지 한숨이 흘러나왔다. 옷장 속의 옷들을 전부 그렇게 처리하고 나니, 옷장 구석에서 서랍장 열쇠를 발견했다. 그렇게 졸라도 녀석이 절대 손대지 못하게 했던 것, 유일하게 열지 못했던 책상의 첫 번째 서랍의 열쇠였다. 녀석이 죽은 후 가장 먼저 찾던 거였다. 그렇게 찾아도 없더니 이렇게 구석에 넣어놨었구나? 난 마침 잘됐다 싶어서 냉큼 서랍을 열어봤다.
서랍 안에는 작은 상자와 꼬깃꼬깃한 종이, 그리고 일기장이 있었다. 난 귀찮아서 금방 관뒀지만, 그 녀석은 워낙 부지런을 떨어서 하루도 일기를 빼먹은 날이 없었다. 우와, 이 자식 이때 원장님이 준 과자를 혼자 다 먹었었구나!? 어쩐지 그날따라 유난히 잘해주더라. 난 그렇게 투덜거리며 일기장을 읽어나갔다. 거기에는 나와 함께했던 소소한 일상이 가득했다. 어쩐지 옛날 일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폭소를 터트리곤 했다. 꼬박꼬박 쓰여 있었지만, 내용은 짧아서 금방 읽을 수 있었다. 그러다 녀석이 처음으로 나와 쌍둥이가 아니라는 걸 안 날의 일기까지 왔다. 정말 나보다 1년 늦게 알았구나? 일기는 『그래서 린이 거리를 두려고 했구나.』라고 시작했다. 그러면서 내가 사실 정에 약해서 가족이라는 결속력을 많이 바라고 있었으니까 더 그랬을 거라며 마음대로 추측해 놨다. 그러니까 진짜 가족이 되면 될 거라면서, 크면 꼭 나랑 결혼할 거란다. 원장님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응원해 주셨다고 커다란 글자로 『힘내자!』라고 되어 있었다. 그다음에도, 그다음에도……. 독립할 때 가구를 골랐을 때도, 『어쩐지 이거 너무 신혼 같잖아? 아직 청혼도 못했는데 괜히 들뜬 내가 바보 같아.』, 『일이 늦게 끝나 늦게 들어온 날에도 언제나 잠들지 않고 기다려 주는 게 너무 고맙고 미안해.』, 『친구에게 이야기했더니 진짜 신혼인 거 아니냐는 말을 들었어. 정말 기뻤어. 그래서 원장님 말고는 비밀로 했었지만, 곧 청혼할 거라고 알려줬어.』라는 이야기들이 적혀 있었다. 언제나 녀석이 내게 할 말이 있다고 했을 때, 내가 언제나 슬쩍 피했던 날에는 『오늘도 청혼 실패. 하지만, 다음에는 꼭 성공할 거다!』……. 일기장에는 그런 이야기로만 가득했다.
상자를 열어보니 투명한 빛의 푸른 반지가 들어 있었다. 꼬깃꼬깃한 종이를 펼쳤다. 여기저기 어디에서 들었는지 각양각색의 청혼문구가 가득했다. 대부분 줄이 죽죽 그어져 있었고, 몇몇 개에는 동그라미가 처져 있었다.
“네가 없는 삶은 생각조차 해본 적 없어. 내게 남은 삶을 줄게. 그러니 나와 영원히 함께해주지 않을래?”
동그라미 속에 있는 글을 이어서 읽어봤다. 이상하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엄청 닭살이네, 느끼해. 그렇게 중얼거리며 상자에서 반지를 꺼내 왼손 약지에 꼈다. 난 녀석에게 파란색을 좋아한다고 했었다. 「핵융합로는 원통형이거든? 들어가면 파란빛에 에워싸이는 거야. 분명히 멋지겠지?」 그건 사실 무의미한 말이었다. 그냥 녀석을 마주 보고 있던 게 괜히 부끄러워서 변명하듯이 한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약지의 반지는 파랗게 반짝반짝. 굉장히 예뻤다.
그날, 난 어린 내 목을 조르는 꿈을 꿨다. 내가 잃은 것을 아직 가지고 있던 날 죽이고 싶었다. 그런 꿈이었다.
그게 그저께다.
* * *
오늘은 녀석이 사라지는 꿈을 꿨다. 친구들이 사라지고, 원장님과 그녀가 사라졌다. 마지막에 녀석이 웃는 얼굴로 천천히 흩어졌다. 놀라서 붙들려고 했지만, 녀석은 연기처럼 내 손을 빠져나갔었다. 녀석이 순식간에 재가 되었었다. 화들짝 놀라 깨었더니 오전 2시였다. 아, 또 이 시간이야? 그런 생각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무심코 문을 바라봤다. 오늘도 열리진 않겠지? 그럼에도, 무의식은 무섭다. 전기밥솥에 하는 밥은 언제나 2인분, 녀석에게 차가운 밥을 먹이기 싫어서 그것도 언제나 보온상태다. 금방 데울 수 있는 국, 혹은 찌개가 가스레인지에 올려져 있다. 녀석이 올 리 없는데 난 녀석이 올 때를 위해 준비해 둔 거다. 그래, 이제 두 번 다시 널 볼 수 없는데…….
밤이 이렇게 길었었나? 방이 이렇게 넓었었나? 여기가 이렇게 조용한 곳이었나?
가슴이 먹먹해졌다. 똑바로 숨을 쉴 수 없어졌다. 아, 그래…… 정말 녀석은, 너는, 렌은 이제 없다.
“꺄아아아아악!”
내 목소리가 아닌 것 같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어째서 이제야 알았을까? 넌 정말 없는 거였어. 이제 돌아오지 않는 거였어. 아무리 원해도 돌아오지 않는 거였어. 그걸 지금 이 순간, 확실하게 깨달았다. 하하, 나 정말 바보잖아? 알고 있었는데 사실은 몰랐던 거야. 사실 아무것도 몰랐던 거였어.
아침이 되자마자 오랜만에 밖으로 나갔다. 근 3일 만이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옷을 차려입고 문을 확실히 잠갔다. 어제 비명에 놀란 이웃이 무슨 일이냐고 물자, 별거 아니었다고. 영화를 좀 크게 틀어놨었다고 대답했다. 다음부터 주의하겠다고 말하고는 무작정 거리로 나갔다.
진심으로 핵융합로에 뛰어들고 싶었다. 그러면 네 곁으로 갈 수 있겠지? 고통도 없이 한순간에, 마치 잠자듯이 말이야. 그렇게 내가 사라진 아침은 분명히 지금보다 훨씬 멋지고, 모든 것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세상일 거야. 내가 네 곁으로 가면 분명히 그렇게 될 거야. 너라는 톱니바퀴가 사라진 난 반쪽밖에 되지 못해. 그랬던 거였어. 그렇지, 렌?
무작정 걷고 걸어 언제고 녀석이 그냥 번지점프를 하는 기분으로 한 번쯤 뛰어내려 보고 싶다고 했던 전망대에 올랐다. 주위에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 제법 넓은 난간에 올라섰다. 이제 한 걸음, 핵융합로에 들어가는 건 무리라도 여기에서 뛰어내리면 렌의 곁으로 갈 수 있다.
이제 한 걸음.
「흐음, 린. 내가 먼저 죽어버리면 어떻게 할 거야?」
녀석의 목소리가 곁에서 들려오는 것 같다. 그건 언제고 렌이 내게 한 질문이었다. 내가 뭐라고 대답했었더라?
「즉답으로 따라 죽겠다야? 응? 나? 나야 뭐…… 그래도 일단 살지 않을까?」
치사해, 어째서? 내가 죽었다는 데 넌 살겠다는 거냐?! 그렇게 화를 버럭 냈었다. 그에 렌이 히죽 웃으면서 능글거렸다. 이때는 좀 재수였지. 다 알고 있다는 것 같은 눈빛이 특히 마음에 안 들었었다.
「린은 내가 따라 죽길 원하는 거야? 뭐, 그럼 죽을까?」
대답하는 꼬락서니 하고는……. 결국 싫다고 말했다는 게 억울했었다. 정말 시시껄렁하고 한심한 대화였다. 그런데 왜 지금 떠오른 걸까? 왜 하필?
「거봐. 나도 린이 따라 죽는 걸 원하지 않는다고. 먼저 죽은 놈이 바보야! 라면서 나 보란 듯이 잘살았으면 하는 걸? 행복하게 말이야. 힘들더라도…… 그래 줬으면 해. 그게 내 소망이야.」
한 걸음. 단 한 발짝이면 렌의 곁으로 갈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며 진심을 담아 웃던 파란 눈동자가 떠올랐다. 이제 한 걸음이면 되는 데…… 난 결국 움직이지 못했다. 왼손 약지에 낀 반지가 무거웠다. 그 녀석이 왼손을 잡고 놓지 않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상한 일이지? 네가 옆에 있을 리 없는데 말이야, 그냥 네가 지금 내 손을 잡은 기분이 들어. 네가 날 붙잡은 느낌이 들어. 속절없이 눈물이 흐른다. 멍청하게 울기만 하는 건 질색이다. 그런데 녀석이 죽은 후부터 계속 그래 온 거 같다.
네 말이 날 잡고 놓지 않아, 렌. 어쩌면 좋아? 넌 왜 그렇게 바보니. 나 하나쯤은 욕심내도 되잖아? 데려가겠다고 비장하게 나타나도 좋지 않아? 기꺼이 따라가 줄 생각인데 말이야. 넌 따라간다는 것도 지금 뜯어말리는 거니? 내가 졌다. 정말 졌어. 난 허탈하게 웃으며 눈물을 닦았다.
난 오늘 살기로 결정했다.
생각보다 기네요.
세세하지만 필요없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이를테면 왜 루카였나 같은 거요.[…]
하지만, 생략합니다.
원곡이랑 정말 안 어울리네요.[…]
요즘 심정으로는 제가 융합로에 뛰어들어야 할 것 같아요.
아, 커플링 표기가 요상한 건 그러려니 해주세요.
이것도 언젠가 갈아엎겠지만, 지금은 이대로 갑니다.[…]
노래 분위기랑 심하게 다릅니다.
가사는 일단 다 나오기는 합니다만, 연관성은 별로 없어 보입니다.
진짜 그냥 창작으로 넘길까 고민했었더랬죠.
BGM으로 원곡을 깔고 싶었지만, 느려서 포기했습니다.
이 아이들의 성격은 제가 생각하는 것과 많이 다릅니다.
모쪼록 유념해주세요.
(노심융해)
- 作 Kamar
나는 고아다. 그것도 혼혈임이 분명한 금발 벽안의 고아다. 난 태어나자마자 이름도 받지 못하고 보육원에 버려졌었다. 난 그 이야기를 듣고 ‘요즘 세상에도 그렇게 고전적인 방법으로 애를 버리는 사람이 있었네.’라고 조금 태평스럽게 생각했었다. 그렇게 버려지긴 했어도 좋은 원장님 밑에서 그 녀석과 함께 나름 행복하게 자랐으니까. 나는 그랬지만, 원장님은 내가 충격을 받았다고 생각했었는지 말을 바꿔서 그 녀석의 이야기를 했었다. 그 녀석은 내가 발견되고 3일 후에 같은 장소에 버려져 있었다며, 똑같은 금발 벽안에 얼굴까지 닮고 우렁찬 목소리까지 닮아서 카가미네(鏡音)라고 성을 지었다고 하셨다. 그럼 이름은 뭐로 할까 고민하다가 외국인이고 하니 영어로 오른쪽(Right), 왼쪽(Left)에서 린(Rin)과 렌(Len)으로 지었다면서 웃으셨다. 내가 왼쪽에 있었다면 렌이 되었겠네요. 급조된 게 확실한 이름의 유래가 마음에 들지 않아 심통하게 말했더니, 원장님은 유쾌하게 웃으면서 「그랬다면 린(Lin)이고 렌(Ren)이지.」라고 하셨다.
그때가 14살 때다. 녀석은 아직 우리가 쌍둥이라고 알던 때다. 그래,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까지 나도 그 녀석도 멍청했었다. 이란성이건 일란성이건 쌍둥이의 혈액형이 다를 리 없는데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다니……. 나는 AB형, 그 녀석은 O형. 쌍둥이라면 될 수 없는 혈액형이다. 형제는 간신히 될 수 있었을까? 3일 정도 차이 나는 형제? 그건 웃긴 이야기잖아. 나와 그 녀석은 형제가 아니었다. 가족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머릿속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곧 안도했다. 어차피 가족이 아니라고 해서 하루아침에 그 녀석이 사라질 리 없잖아. 난 그렇게 안도했고 안심했었다.
멍하니 창밖을 보고 있자니 네온사인의 빛이 눈을 찔렀다. 밤이라 해도 눈부시구나. 방안이 어두워서인지는 몰라도 오늘따라 유난히 밝아서 눈이 따가웠다. 이상하게도 몸이 차갑게 식어버린 느낌이다. 마취라도 된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몸이 천근처럼 무겁다.
한참을 그러고 있는데 문득 목이 탔다. 시계를 보니 벌써 오전 2시다. 6시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았으니 목이 탈만도 하지. 굳어 있던 몸을 억지로 일으켜 냉장고에서 캔 맥주를 꺼내 들었다. 내일도 7시에 일어나야 하건만 잠이 오지 않았다. 다시 시계를 본다. 아직 정각 2시였다. 고개를 돌려 문을 바라봤다. 여전히 굳게 잠겨 있다. 올 사람도 없다. 그런데도 난 누굴 기다리는 거지? 그래, 올 사람은 없다. 그 녀석도 이젠 없다. 내 곁에 없다.
캔을 땄다. 차가운 맥주를 마시고 나니 멍하던 머리가 조금 정리되는 기분이다. 담배를 어디다 뒀더라? 구석에 던져둔 담배를 찾아 입에 물고 라이터를 켰다. 그런데 이게 치직거리는 소리만 나고 불꽃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필이면 이때 기름이 떨어진 거야? 짜증이 왈칵 치밀어 올랐다. 수제라서 쓸데없이 비싼 라이터 주제에 기름까지 빨리 닳는다. 분명히 이주일 전에 그 녀석이 기름을 넣어줬건만 그새 바닥이다.
이 라이터도 그 녀석이 줬다. 내가 담배를 입에 물면 기겁하면서 피지 말라고 난리 치던 놈이 생일날 선물이랍시고 이걸 줬다.
「담배를 끊으면 좋지만, 안 끊을 거지? 하여튼 몸에 안 좋은 것만 골라서 한다니까. 내가 네 고집을 어떻게 이겨? 여자애가 아무거나 들고 다니지 말고 그거 가지고 다녀. 너 닮아서 산 거니까 팔아먹거나 버리지 말고, 신경질 난다고 던지지도 말고. 알았지?」
라이터에 그려진 노란색 장미가 그렇게도 날 닮았다는 거냐? 그때는 그렇게 투덜거렸었다. 그리고 가격도 궁금했었다. 아무리 봐도 우리 형편에 어울리는 물건이 아니다. 녀석은 끝까지 대답하지 않았었고, 난 슬쩍 전당포로 가서 물어봤었다. 중고라고 해도 약 70만. 실용성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으려 해도 찾아볼 수 없던 라이터는 그렇게나 비쌌다. 미친놈, 이걸 무슨 정신으로 선물이랍시고 준 걸까?
어차피 이거 던져도 뭐라고 할 사람도 없는데 그냥 콱 던져버릴까? 그렇게 생각하며 잠시 라이터를 노려봤다. 하아, 보고 있자니 이걸 주면서 시원하게 웃던 녀석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만둘까? 라고 생각하기가 무섭게 화가 치밀어 올랐다. 웃는 얼굴이 떠오르면 뭐하지? 이젠 없는데? 결국, 던져버렸다. 자자. 바보짓도 이쯤 하자. 속이 타는 듯이 뜨겁다. 하아, 이런 곳 하나하나에 스트레스받으면 살아가기 힘들다. 난 그렇게 날 다독였다.
힘겹게 몸을 움직여 방에 들어갔더니 아침노을이 방안에 스며들고 있었다. 하? 이건 또 뭐람?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어? 어처구니없어서 시계를 봤더니 벌써 6시였다. 밤을 새웠다는 걸 자각해서인지 머리가 지끈거려왔다. 난 휴대폰을 찾아서 전원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하루쯤은 정말 일하기 싫은 날도 있는 거다. 자자. 자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한참을 누워 있었다. 몸도 머리도 마음도 무거웠지만, 정작 잠들지 못했다. 아무도 오지 않을 거다. 이젠 올 사람도 없잖아. 그런데도 마음 어딘 가에서는 거짓말이라고 속삭이고 있다. 그 녀석이 곧 배고프다면서 돌아올 거야. 그럼 난 한심하다는 듯이 일어나서 밥을 차려주겠지? 녀석은 미안한 듯 기쁜 듯 웃고? 그래, 그런 일상이 계속 되었다면 정말로 좋았을 텐데 말이야. 왜 그게 사실이 아니지? 잠들기가 너무 어렵다.
멍하니 몸을 일으켰다. 시계를 보니 벌써 오후 6시다. 모르긴 해도 10시간은 족히 잔 것 같다. 그렇게 오래 잤으면 몸이라도 좀 풀릴 것이지 오히려 더 굳어서 어깨가 무거웠다.
꿈을 꿨었다. 어린 날의 내가 그 녀석과 놀고 있었다. 천진난만하게 웃는 얼굴에 짜증이 치밀어 올랐었다. ‘죽일까?’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왜 그렇게 짜증이 났을까? 빛이 쏟아지던 오후 2시. 처음으로 녀석이 내게 노래를 불러주었던 날. 영원히 함께 있자고 했던 날. 그리고 거짓이 되어버린 날의 기억이다. 이상하지? 그 녀석보다 곁에서 웃는 내가 더 미웠다. 그래서 꿈속의 나는 어릴 적의 내 목을 노려봤다. 가늘게 떨리며 까르르 웃는 목을 조를까 말까, 정말 쓸데없이 진지하게 고민했었다. 그리고 울고 싶었다. 그런 심정으로 난 어린 날 보고 있었다.
이상한 꿈이었다. 녀석이 없으니 이젠 별별 꿈을 다 꾸는구나. 난 한숨을 쉬며 휴대폰을 찾았다. 분명히 구석으로 집어던졌을 건데 보이지 않았다. 아, 젠장. 되는 일도 없지. 넓지도 않은 방안을 뒤적거리다가 포기하고 주저앉았다. 챙겨둔 담배를 입에 물고 라이터에 불을 켰다. 아차, 기름이 떨어졌지? 결국, 다시 라이터를 집어던졌다.
“핵융합로에라도 뛰어들어버릴까.”
울적하면 입에서 튀어나오던 말이 나왔다. 담배가 없으니 더 우울하긴 해.
처음 이 말을 했을 때, 녀석이 그 파란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면서 「그거 위험한 거 아냐?」라고 했었다. 단순히 위험하기만 하겠냐? 내부 온도는 낮아도 5,000℃라네. 태평스레 그렇게 대답했더니 녀석이 기겁하면서 왜!? 라고 외쳤다.
「거기 들어가면 뼈는 남길 수 있는 거야?! 아니, 그전에 왜 그렇게 무서운 생각을 하는 건데!?」
녀석이 그렇게 질색하며 화내는 건 처음 봤었다. 파란 눈동자가 반짝반짝…… 우습게도 그게 예쁘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안은 새파랗게 반짝인다더라고. 분명히 예쁘겠지?」라고 말해버렸다. 안이 새파란 빛이라는 건 사실이었지만, 사실 파란색을 딱히 좋아하는 건 아니었는데 말이다. 그에 녀석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절절히 짓더니, 곧 피식 웃으며 「파란색이 좋아?」라고 물었다. 살짝 웃는 파란 눈동자가 좋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 저 눈동자가 예뻐서 그런 게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은 듯 입에서 저절로 말이 튀어나왔었다.
「핵융합로는 원통형이거든? 들어가면 파란빛에 에워싸이는 거야. 분명히 멋지겠지?」
「제발, 생각만으로 참아주라.」
녀석이 허탈하게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었었다. 어린애 취급하는 거 같아서 싫다고 했었는데…… 그날은 딱히 싫지 않았다. 파란 눈동자가 상냥하게 웃어줬으니까, 그러니 괜찮았다.
“정말…… 뛰어들어버릴까?”
그럼 죽는 것조차 모르고 죽어버리겠지. 재도 남기기 어렵겠지? 그럼…… 모든 것을 용서할지도 모른다. 나도 그 녀석도 용서될지 몰라. 한순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면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넌 어때? 그때처럼 화내면서 말릴래? 있지도 않는 놈에게 괜히 물어봤다. 아, 젠장. 또 조금 울고 싶어진다.
-퉁, 퉁, 퉁.
베란다 저편에서 누군가 계단 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무심코 밖을 바라봤더니 회색 구름이 붉은 노을 사이를 춤추듯 흐르고 있었다. 그렇게 흐려진 하늘이 유리창을 넘어 방 안에 스며드는 것 같다. 우울해지면 별생각을 다 하게 된다. 이상하지? 세상이 너무 흐려. 노을이 점점 짙어진다. 구름이 잠식하는 붉은빛. 아, 아니구나. 내가 언제부터인가 울고 있었다.
“눈물이 볼록렌즈의 역할을 해서 태양이 더 커 보이는 거야. 붉은색이 더 넓어 보이는 거야.”
아무도 없는 방안에서 혼자 그렇게 중얼거렸다. 세상이 그렇게 조금씩 죽어간다. 되는 일도 없고 너무 우울해서 「이 눈물에 녹아 나의 세상이 조금씩 죽어가고 있어.」라고 그 어느 날 나는 녀석에게 말했었다. 녀석은 말없이 그런 날 안아줬었다. …… 난 결국 눈을 감았다. 눈꺼풀 너머로 붉은빛이 스며들어온다. 눈이 따갑다.
잠깐 설 잠이 들었었다. 난 어린 나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녀석 곁에서 잠든 모습에 화가 났다. 14살의 봄. 바람에 흔들리는 커튼 아래에서 녀석이 연주하는 자장가를 들으며 잠든 척 녀석의 다리를 베고 있었다. 그런 내가 그때 녀석에게 말하지 못했던 말을 했다. 긴장해서 메마른 입술, 움직일 때마다 조금씩 갈라진다. 내가 한 말은 거품처럼 흩어져 녀석에게 닿지 않았다. 하지만, 녀석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렸다는 듯이 기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나도 행복하게 웃으면서 녀석의 곁에 누워 잠이 들었다. 이건 거짓이다. 난 끝끝내 아무런 말도 못했었다. 연주를 하던 녀석이 내가 잔다고 생각한 건지 이마에 키스하고는 슬쩍 곁에 누워 잠들 때까지 끝내 말하지 못했었다. 그저 잠든 녀석을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었다. 그래서 화가 난 거다. 이런 추억조차 거짓으로 덧칠할 정도로 미련하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거다. 그래 그런 거야.
“핵융합로에 뛰어들고 싶어.”
눈도 뜨지 않고 그렇게 말했다.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몇 달 전에 녀석에게 미인을 소개받았었다. 이름은 루카라고 했었지? 당당하고 차가운 느낌의 미인이었다. 하지만, 녀석을 보고 웃을 때면 분위기가 많이 풀려 털털한 이웃집 언니 같았다. 둘이서 각자 필요한 물건을 사러 나왔을 때 우연히 만난 거였다. 둘은 많이 친한 것 같았다. 서로 스스럼없이 대하는 게 사실 조금 부러웠고, 조금 신경 쓰였다. 녀석이 그때 내게 비밀을 만들었기에 더 그랬었다.
쌍둥이처럼 같이 자랐다. 떨어져서 살아가는 게 이상할 정도로 녀석과는 함께였다. 보육원을 나와서도 함께였다. 녀석은 그런 가족이었지만, 내게 비밀을 만들었다. 난 그 점이 싫었다. 그때는 이유를 몰라 그냥 녀석에게 심통만 부렸었다. 그때 함께 나간 것도 짜증만 냈던 게 미안해서였다. 「형제라도 데이트는 할 수 있잖아.」라고 내가 먼저 청했었다. 그전에 ‘녀석이 살 게 있다고 말했었으니까…….’라는 핑계도 있었다. 녀석이 기뻐했기에 참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사실 나도 조금 들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낯선 미인은 달갑지 않았다. 특히나 녀석과 친근해 보여서 더 거슬렸다. 그러다 녀석이 살려고 한 것을 찾았다면서 자리를 비웠다. 덕분에 나와 그녀는 서먹서먹하게 서로 바라봤었다. 그녀가 잠시 어색하게 웃다가 내게 살짝 속삭였다.
「쌍둥이…… 라고 하셨죠? 저 사실 렌을 좋아해요. 잘 되게 도와주실래요?」
난 왜 그때 고개를 끄덕였을까? 무심코 알았다고 중얼거렸었다. 조금도 그럴 생각이 없었는데……. 그날 어떻게 집에 돌아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녀석이 내게 「괜찮아? 혹시 루카에게 무슨 말을 들은 거야?」라며 물었을 때도 아니라고 대답했었다. 녀석이 어색하게 웃으면서 「저기 진짜 아무 말도 들은 거 아니지?」라고 다시 물었다. 순간 너도 그녀를 좋아하는 거냐고 화낼 뻔했지만, 간신히 참았다. 대신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고 했다. 녀석이 조금 섭섭하고도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그녀를 좋아하는 걸까? 하지만, 난 끝내 못 물었다.
그때 그냥 멱살을 잡고 무슨 말이냐고 화내면서 물어볼 걸……. 난 무서워서 아무 말도 안 했다. 녀석이 그 좋아하던 바이올린도 그만두고 날 위해 굳은 일도 마다하지 않았는데, 난 녀석이 비밀이 있다는 것에…… 고작 그 작은 것에 배신감을 느끼곤 입을 닫고 짜증만 냈었다.
난 사실 음악을 좋아했다. 그건 녀석도 같았다. 어릴 때는 원장님이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구해주셔서 함께 연주하곤 했다. 난 평범한 수준이었지만, 녀석에게는 제법 재능이 있었다. 유명한 콩쿠르에서 상도 몇 개 받았을 정도다. 내가 음악을 그만둔 것에는 그런 실질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사실 녀석이 연주할 때면 즐거운 듯 웃는 걸 보는 게 좋아서다. 좀 더 좋은 악기를 사주고 싶었다. 그래서 좋아하지도 않는 공부에 집중했었다. 돈을 벌어서 녀석에게 선물해야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정작 그 녀석은 날 대학에 보내겠다며 대뜸 그렇게 아끼던 바이올린을 팔아버리고 공장에 들어갔었다.
공부를 좋아하지 않았어. 좋아하지도 않는 것을 하면 네가 싫어하니까 좋아하는 척했을 뿐이야! 하지만, 이미 팔아먹은 건 어쩔 수 없지. 내가 열심히 해서 녀석에게 음악을 돌려주자. 난 그렇게 생각했었다. 피는 이어지지 않았지만, 가족이니 분명히 알아주겠지? 한없이 이기적인 나. 녀석에게는 가족이라도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고 했었다. 멋대로 생각하고 결정했으면서, 사실은 녀석을 조금도 믿지 않아 배신당했다고 느꼈다. 나지만 정말 징그럽게 이기적이다. 이딴 걸 그 녀석은 그렇게나 아꼈었지.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간다. 추억이 멋대로 표백되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해간다. 마치 그게 미련이라는 것처럼 어처구니없는 꿈을 꾼다. 웃기지도 않아. 지금 내 꼴은 너무 한심하다. 한숨처럼 진심이 새어나왔다.
“핵융합로에 뛰어들어 죽어버리면…….”
전처럼 편하게 잠들 수 있을 거 같았다.
-째깍, 째깍
흐릿한 의식 속에 시계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방안에 가라앉은 적막에 무심코 TV를 켰다. 오락프로인가? 사회자가 웃기지도 않은 농담을 했다. 그랬더니 카메라에 비치지 않는 방청객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TV를 끄고 리모컨을 집어던졌다.
윙하는 이명(耳鳴)이 일었다.
그날처럼 이명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때도 녀석을 기다리고 있었다. 뭔가 조금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는 걸, 혹시나 그녀와 관련된 일인 것 같아서 피했었다. 그때마다 녀석은 「알았어. 뭐, 시간은 많으니까…….」라며 넘어갔었다. 그것도 벌써 7번.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지만, 끈덕지게 말하려고 해서 일부러 기다렸다. 사실 마음을 다잡는데 그만큼의 시간이 걸렸었다. 그러다 오전 2시가 되었다. 이상할 정도로 늦다고 생각했는데 전화가 왔었다.
병원, 응급실, 위급.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엉겁결에 병원으로 가고, 원장님을 만났다. 원장님의 손은 새빨간 피투성이였다. 그리고 그 앞에 붉게 물드는 하얀 천을 뒤집어쓴 녀석이 있었다. 아니, 그게 녀석이라고 했다. 이게 무슨 농담인 걸까?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천을 벗기려고 했지만, 원장님이 말렸다. 보지 말라고, 자기 때문에 저렇게 되었다면서 내게 계속 미안하다고 했다. 왜 내게 미안하다는 걸까? 난 그저 녀석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말리는 원장님을 진정시키고 들춘 하얀 천 밑에는 조금 창백한 안색의 녀석이 있었다. 무심코 손을 뻗었다가 흠칫 놀랐다. 언제나 따뜻하던 녀석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점점 더 차가워지고 있었다. 교통사고라고 했다. 원장님을 구하다가 대신 치여 버렸다고 한다. 역시 멍청한 놈. 다른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부터 지독한 이명이 일었다.
그 후, 무슨 말을 들었는지, 무슨 말을 했는지, 어떻게 된 건지 조금도 기억나지 않는다. 이명이 사라지고 온전히 정신을 차린 건 녀석이 한 줌의 재가 된 후였다.
원장님이 내게 다시 미안하다고 했다. 난 그때 녀석이 든 보험의 수취인으로 엄청난 액수의 보험금을 받았다. 그걸 어떻게 쓰나 고민하고 있던 터라 그냥 괜찮다고 했었다. 그랬더니 원장님이 내 안색이 말이 아니라면서, 이젠 어떻게 할 것인지 물었다. 그냥 평소대로 살지 않을까요? 그렇게 대답하려고 했었다.
「약혼자가 죽어서 어쩐다니, 정말 미안하다. 정말 미안해.」
무슨 말인지, 이번에도 이해하지 못했다.
「어머, 설마……. 렌에게 아무런 말도 못 들었던 거니?」
뭘요? 무슨 말이요?
「어떻게 된 일이니? 렌은 분명히 네게 청혼할 거라고 했단다. 15살 때 너와 가족이 아니라는 걸 알고는 내게 그랬었어. 너희가 독립할 때도 그랬단다. 아니라면 내가 너와 렌이 함께 독립하겠다는 걸 허락했을 리 없잖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원장님은 대강 끼워 맞춰 이름 짓는 센스와는 달리 뜻밖에도 원리원칙주의자였다. 아무리 친하게 지내더라도 결혼을 약속하지 않은 이상 함께 독립하도록 허락한 적이 없었다. 난 우리가 쌍둥이라서 허락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쌍둥이가 아니라는 걸 원장님은 확실히 알고 있다. 어라? 생각의 꼬리가 비틀려 정리되지 않았다. 어떻게 원장님을 배웅했었는지 기억나지도 않았다. 언제나 애 취급을 했었잖아. 언제나 가족이상의 취급을 하지 않았었잖아. 그런데 이게 뭐야? 어지러웠다.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기분이었다.
그녀도 찾아왔다. 그녀는 원장님과 같은 말을 했다. 처음에는 조금 관심이 있어서 접근한 적이 있지만, 지금은 전혀 아니라고 말했다. 그 녀석은 조금도 돌아보지 않고 오로지 나만을 바라봤다면서, 그런 사랑을 받는 게 부러운데 정작 내가 그런 걸 조금도 모르는 것 같아서 심술부렸다며 미안하다고 했다. 이번에도 무슨 말인지 확실하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가 멍하니 있자, 그녀가 사실 녀석이 내게 청혼 준비하는 것을 도왔다고 말했다. 그녀는 일이 이렇게 되어서 안타깝다면서 내게 힘내라고 하고는 돌아갔다. ……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나만 모르고 있었어? 머리도 마음도 복잡했다. 정리되지 않았다.
심기일전으로 방을 치웠다. 이젠 혼자 살게 되었으니 쓸모없는 것들을 치워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녀석의 짐을 정리했다. 생각해보면 가구도 함께 고른 거였다. 그때 어쩌다 침대를 하나밖에 사지 않아 녀석은 바닥에서 잤다. 가끔 뭐 어떠냐면서 같이 자자고 했을 때, 녀석은 나이를 생각하자면서 그냥 바닥에서 잤었다. 가끔 자는 녀석의 품에 파고들어 자기도 했다. 기겁하며 물러서던 녀석을 보던 것도 일종의 재미였다. 그때가 떠올라 피식 웃으며 천천히 돌아보니 집에는 온통 세트거나 함께 고른 물건밖에 없었다. 커플 머그컵, 커플 룩, 같이 고민해서 산 장신구, 내가 조르고 졸라서 산 티세트, 난 어울린다고 했지만 정작 녀석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모자. 내가 쓴 걸 보고 싶다고 하면 그날은 종일 쓰고 있어줬다.
아, 유일하게 같이 고르지 않았던 물건은 책장에 꽂힌 책이었다. 작곡과 연주기법, 악보들, 녀석이 음악을 포기하고 바로 버렸던 것들이다. 그걸 내가 주워서 다시 꽂아뒀다. 그에 다시 버리려던 걸 내가 말렸었다. 언제고 난 녀석에게 다시 음악을 돌려줄 생각이었으니까 다 버리면 곤란했다. 나의 결사반대에 녀석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그냥 뒀지만, 다시 저 책들을 읽지 않았다. 그저 가끔 그립다는 표정으로 책장을 봤었다. 그럴 때면 내가 억지로 보게 했었다. 이래저래 아는 사람에게 악기도 빌려서 연주하게 했었다. 녀석은 그런 내 행동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언제나 멋진 연주를 들려줬었다. 난 책들을 쓰다듬다 결국 손을 뗐다. 이건 절대 버릴 수 없다.
결국, 목표는 줄어 마지막 옷장을 열었다. 옷은 남자 옷이니 입을 수 없겠다 싶어서 대강 꺼내서 상자에 차곡차곡 담았다. 어차피 못 입는 거니까 그냥 버리자. 그런 마음으로 상자를 들었지만, 결국 그냥 창고에 넣어두기로 했다. 어쩐지 한숨이 흘러나왔다. 옷장 속의 옷들을 전부 그렇게 처리하고 나니, 옷장 구석에서 서랍장 열쇠를 발견했다. 그렇게 졸라도 녀석이 절대 손대지 못하게 했던 것, 유일하게 열지 못했던 책상의 첫 번째 서랍의 열쇠였다. 녀석이 죽은 후 가장 먼저 찾던 거였다. 그렇게 찾아도 없더니 이렇게 구석에 넣어놨었구나? 난 마침 잘됐다 싶어서 냉큼 서랍을 열어봤다.
서랍 안에는 작은 상자와 꼬깃꼬깃한 종이, 그리고 일기장이 있었다. 난 귀찮아서 금방 관뒀지만, 그 녀석은 워낙 부지런을 떨어서 하루도 일기를 빼먹은 날이 없었다. 우와, 이 자식 이때 원장님이 준 과자를 혼자 다 먹었었구나!? 어쩐지 그날따라 유난히 잘해주더라. 난 그렇게 투덜거리며 일기장을 읽어나갔다. 거기에는 나와 함께했던 소소한 일상이 가득했다. 어쩐지 옛날 일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폭소를 터트리곤 했다. 꼬박꼬박 쓰여 있었지만, 내용은 짧아서 금방 읽을 수 있었다. 그러다 녀석이 처음으로 나와 쌍둥이가 아니라는 걸 안 날의 일기까지 왔다. 정말 나보다 1년 늦게 알았구나? 일기는 『그래서 린이 거리를 두려고 했구나.』라고 시작했다. 그러면서 내가 사실 정에 약해서 가족이라는 결속력을 많이 바라고 있었으니까 더 그랬을 거라며 마음대로 추측해 놨다. 그러니까 진짜 가족이 되면 될 거라면서, 크면 꼭 나랑 결혼할 거란다. 원장님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응원해 주셨다고 커다란 글자로 『힘내자!』라고 되어 있었다. 그다음에도, 그다음에도……. 독립할 때 가구를 골랐을 때도, 『어쩐지 이거 너무 신혼 같잖아? 아직 청혼도 못했는데 괜히 들뜬 내가 바보 같아.』, 『일이 늦게 끝나 늦게 들어온 날에도 언제나 잠들지 않고 기다려 주는 게 너무 고맙고 미안해.』, 『친구에게 이야기했더니 진짜 신혼인 거 아니냐는 말을 들었어. 정말 기뻤어. 그래서 원장님 말고는 비밀로 했었지만, 곧 청혼할 거라고 알려줬어.』라는 이야기들이 적혀 있었다. 언제나 녀석이 내게 할 말이 있다고 했을 때, 내가 언제나 슬쩍 피했던 날에는 『오늘도 청혼 실패. 하지만, 다음에는 꼭 성공할 거다!』……. 일기장에는 그런 이야기로만 가득했다.
상자를 열어보니 투명한 빛의 푸른 반지가 들어 있었다. 꼬깃꼬깃한 종이를 펼쳤다. 여기저기 어디에서 들었는지 각양각색의 청혼문구가 가득했다. 대부분 줄이 죽죽 그어져 있었고, 몇몇 개에는 동그라미가 처져 있었다.
“네가 없는 삶은 생각조차 해본 적 없어. 내게 남은 삶을 줄게. 그러니 나와 영원히 함께해주지 않을래?”
동그라미 속에 있는 글을 이어서 읽어봤다. 이상하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엄청 닭살이네, 느끼해. 그렇게 중얼거리며 상자에서 반지를 꺼내 왼손 약지에 꼈다. 난 녀석에게 파란색을 좋아한다고 했었다. 「핵융합로는 원통형이거든? 들어가면 파란빛에 에워싸이는 거야. 분명히 멋지겠지?」 그건 사실 무의미한 말이었다. 그냥 녀석을 마주 보고 있던 게 괜히 부끄러워서 변명하듯이 한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약지의 반지는 파랗게 반짝반짝. 굉장히 예뻤다.
그날, 난 어린 내 목을 조르는 꿈을 꿨다. 내가 잃은 것을 아직 가지고 있던 날 죽이고 싶었다. 그런 꿈이었다.
그게 그저께다.
오늘은 녀석이 사라지는 꿈을 꿨다. 친구들이 사라지고, 원장님과 그녀가 사라졌다. 마지막에 녀석이 웃는 얼굴로 천천히 흩어졌다. 놀라서 붙들려고 했지만, 녀석은 연기처럼 내 손을 빠져나갔었다. 녀석이 순식간에 재가 되었었다. 화들짝 놀라 깨었더니 오전 2시였다. 아, 또 이 시간이야? 그런 생각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무심코 문을 바라봤다. 오늘도 열리진 않겠지? 그럼에도, 무의식은 무섭다. 전기밥솥에 하는 밥은 언제나 2인분, 녀석에게 차가운 밥을 먹이기 싫어서 그것도 언제나 보온상태다. 금방 데울 수 있는 국, 혹은 찌개가 가스레인지에 올려져 있다. 녀석이 올 리 없는데 난 녀석이 올 때를 위해 준비해 둔 거다. 그래, 이제 두 번 다시 널 볼 수 없는데…….
밤이 이렇게 길었었나? 방이 이렇게 넓었었나? 여기가 이렇게 조용한 곳이었나?
가슴이 먹먹해졌다. 똑바로 숨을 쉴 수 없어졌다. 아, 그래…… 정말 녀석은, 너는, 렌은 이제 없다.
“꺄아아아아악!”
내 목소리가 아닌 것 같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어째서 이제야 알았을까? 넌 정말 없는 거였어. 이제 돌아오지 않는 거였어. 아무리 원해도 돌아오지 않는 거였어. 그걸 지금 이 순간, 확실하게 깨달았다. 하하, 나 정말 바보잖아? 알고 있었는데 사실은 몰랐던 거야. 사실 아무것도 몰랐던 거였어.
아침이 되자마자 오랜만에 밖으로 나갔다. 근 3일 만이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옷을 차려입고 문을 확실히 잠갔다. 어제 비명에 놀란 이웃이 무슨 일이냐고 물자, 별거 아니었다고. 영화를 좀 크게 틀어놨었다고 대답했다. 다음부터 주의하겠다고 말하고는 무작정 거리로 나갔다.
진심으로 핵융합로에 뛰어들고 싶었다. 그러면 네 곁으로 갈 수 있겠지? 고통도 없이 한순간에, 마치 잠자듯이 말이야. 그렇게 내가 사라진 아침은 분명히 지금보다 훨씬 멋지고, 모든 것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세상일 거야. 내가 네 곁으로 가면 분명히 그렇게 될 거야. 너라는 톱니바퀴가 사라진 난 반쪽밖에 되지 못해. 그랬던 거였어. 그렇지, 렌?
무작정 걷고 걸어 언제고 녀석이 그냥 번지점프를 하는 기분으로 한 번쯤 뛰어내려 보고 싶다고 했던 전망대에 올랐다. 주위에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 제법 넓은 난간에 올라섰다. 이제 한 걸음, 핵융합로에 들어가는 건 무리라도 여기에서 뛰어내리면 렌의 곁으로 갈 수 있다.
이제 한 걸음.
「흐음, 린. 내가 먼저 죽어버리면 어떻게 할 거야?」
녀석의 목소리가 곁에서 들려오는 것 같다. 그건 언제고 렌이 내게 한 질문이었다. 내가 뭐라고 대답했었더라?
「즉답으로 따라 죽겠다야? 응? 나? 나야 뭐…… 그래도 일단 살지 않을까?」
치사해, 어째서? 내가 죽었다는 데 넌 살겠다는 거냐?! 그렇게 화를 버럭 냈었다. 그에 렌이 히죽 웃으면서 능글거렸다. 이때는 좀 재수였지. 다 알고 있다는 것 같은 눈빛이 특히 마음에 안 들었었다.
「린은 내가 따라 죽길 원하는 거야? 뭐, 그럼 죽을까?」
대답하는 꼬락서니 하고는……. 결국 싫다고 말했다는 게 억울했었다. 정말 시시껄렁하고 한심한 대화였다. 그런데 왜 지금 떠오른 걸까? 왜 하필?
「거봐. 나도 린이 따라 죽는 걸 원하지 않는다고. 먼저 죽은 놈이 바보야! 라면서 나 보란 듯이 잘살았으면 하는 걸? 행복하게 말이야. 힘들더라도…… 그래 줬으면 해. 그게 내 소망이야.」
한 걸음. 단 한 발짝이면 렌의 곁으로 갈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며 진심을 담아 웃던 파란 눈동자가 떠올랐다. 이제 한 걸음이면 되는 데…… 난 결국 움직이지 못했다. 왼손 약지에 낀 반지가 무거웠다. 그 녀석이 왼손을 잡고 놓지 않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상한 일이지? 네가 옆에 있을 리 없는데 말이야, 그냥 네가 지금 내 손을 잡은 기분이 들어. 네가 날 붙잡은 느낌이 들어. 속절없이 눈물이 흐른다. 멍청하게 울기만 하는 건 질색이다. 그런데 녀석이 죽은 후부터 계속 그래 온 거 같다.
네 말이 날 잡고 놓지 않아, 렌. 어쩌면 좋아? 넌 왜 그렇게 바보니. 나 하나쯤은 욕심내도 되잖아? 데려가겠다고 비장하게 나타나도 좋지 않아? 기꺼이 따라가 줄 생각인데 말이야. 넌 따라간다는 것도 지금 뜯어말리는 거니? 내가 졌다. 정말 졌어. 난 허탈하게 웃으며 눈물을 닦았다.
난 오늘 살기로 결정했다.
세세하지만 필요없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이를테면 왜 루카였나 같은 거요.[…]
하지만, 생략합니다.
원곡이랑 정말 안 어울리네요.[…]
요즘 심정으로는 제가 융합로에 뛰어들어야 할 것 같아요.
이것도 언젠가 갈아엎겠지만, 지금은 이대로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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